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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미최 Aug 25. 2023

여름을 나는 게 유독 힘들었나요?

복약안내서의 말_ 002

     지난 8월 23일은 24 절기 중 '처서(處暑)'였습니다. 이로서 여름을 떠올리는 올해의 모든 절기가 끝난 셈이지요. 가을로 들어가는 절기인 '입추(入秋)'는 이미 8월 초에 지나갔으니 절기상으로는 이미 가을입니다. 옛날에 절기는 할아버지 할머니만 세는 건 줄 알았는데 한의사가 된 후로 기후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절기를 항상 숙지하고 환자의 상태를 살피거나 예후를 판단할 때 사용하곤 하지요.


절기는 생각보다 놀라워서 한 지점을 넘으면 신기할 정도로 뚜렷한 계절의 변화가 감지되곤 합니다. 극단적으로 더웠던 8월 첫 주, 입추가 지나면 그래도 괜찮아질 거라는 저의 위로에 지구 온난화가 절기를 이길 거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건넨 분들도 많았지만 다행히 입추가 지나자마자 밤공기가 선선해진 느낌이 뚜렷했습니다. 하긴, 올해가 앞으로 겪을 여름 중 가장 시원했던 거라는 두려운 뉴스가 떠도니 내년 여름은 또, 모르지요.


올해 폭염은 유난했습니다. 체질과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가 밤낮으로 시달렸지만 와중에 유난히 힘들어하는 여자분들을 만납니다. "저는 여름만 되면 죽을 것 같아요." "여름에 유난히 체력이 떨어지고 지쳐요." "여름에 바깥에 잠시만 서있어도 숨을 못 쉬고 쓰러질 것 같아요." "추위도 타지만 더운 걸 더 못 견디겠어요." 


여름에 특히 '진이 빠지고' '맥을 못 추는' 사람, 혹시 내 얘기인가요?




     여자분들을 진료할 때 더위보다는 추위를 탄다는 말을 더 자주 듣는 게 사실입니다. 추위를 타고, 손발이 차고, 에어컨 바람이 싫다고 말씀하시는 여자분들은 정말 많거든요. 그럼 누가 더위를 탈까요? 보통은 열이 많은 체질이 더위를 탄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열이 많은 체질은 추위도 더위도 타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문진을 해보면 이렇게 말씀하시곤 합니다. "여름에 덥긴 덥지요. 그런데 덥다고 체력이 떨어지거나 그렇지는 않아요." 


더위에 취약한 분들의 흔한 공통점은 혈압이 낮은 분들이 많다는 겁니다. 혈압은 기후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누구나 겨울에 조금 높아지고 여름에 약간 낮아집니다. 추운 겨울에는 혈관도 쉽게 수축되고 활동량도 줄기 때문에 혈압이 높아지고 반대로 여름에는 땀 분비도 늘고 혈관도 수시로 확장되기 쉬워 혈압이 떨어집니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조절되는 수준이지만 원래 혈압이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면 이 차이가 생각보다 클 수 있어요.


같은 사람이라도 혈압의 상황에 따라 체력의 차이가 크게 날 수 있지요.


진료하며 혈압에 대해 여쭤보면 혈압이 높은 분들은 보통 정확히 자신의 혈압을 파악하고 계십니다. 건강검진에서 응급상황으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은 고혈압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진단하고 문제를 파악하여 관리하도록 돕기 때문이지요. 그에 비해 본인이 혈압이 낮다는 걸 인지하고 계신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수축기 혈압이 90 이하, 이완기 혈압이 60 이하일 때 저혈압으로 진단하지만 별다른 증상이 없는 경우가 많아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측정한 혈압이 조금 낮게 나와도 보통 정상 범위에 해당한다고 말하곤 하지요.


그러나 실제로 젊은 여자분들의 삶의 질에서 저혈압의 경향성은 중요합니다. 혈압이 낮으면 특정 상황에서 원할 때, 원하는 만큼의 혈액을 원하는 부위에 적절히 공급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여자의 몸은 냉증이나 말초 순환장애가 일어나기 쉽기 때문에 저혈압에 취약합니다. 무엇보다 월경을 통해 매달 출혈이 일어나기 때문에 평소 빈혈과 저혈압이 없는 사람도 일시적으로는 급성 빈혈, 급성 저혈압의 증상을 경험할 수 있지요. 


한의학에서는 이러한 상태를 '혈허(血虛)'라고 진단합니다. 




     더위에 취약한 것 외에도 저혈압이 있는 분들이 평소에 보이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1. 기립성 현훈이 있습니다. 

앉았다 일어날 때 혹은 누웠다 일어날 때 눈앞이 캄캄해지고 어지러운 증상을 자주 경험합니다. 오래 앉아있다가 일어날수록, 갑자기 벌떡 일어날수록 증상은 심해지기 쉬워 가능하면 천천히 느릿느릿 일어나는 것이 좋습니다. 


2. 아침에 일어나는 게 세상 어렵습니다.

잠을 자는 동안 몸은 심장박동도 줄고 체온도 떨어집니다. 잠에서 깨면 일시에 몸이 다 깨어나는 것이 맞지만 혈압이 낮으면 뇌는 깨어나도 다른 기능까지 다 깨어나는 데에 시간이 더 오래 걸립니다. 저혈압이 있으면 아침형 인간이 되기 매우 어렵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오전 내내 몽롱하다가 오후 세네시가 되어야 좀 머리가 맑아진다고 말하곤 합니다.


3. 식곤증이 심합니다.

음식을 섭취하면 우리 몸의 우선순위는 일단 소화를 시키는 일에 집중됩니다. 위나 장을 활발히 움직이는 데에는 상당히 많은 혈액이 필요하기 때문에 다른 기관, 특히 뇌에 공급되는 혈류가 줄어듭니다. 그래서 식사 후에 어지럽거나 졸음이 쏟아지는 거예요. 이 경우 과식은 금물입니다. 조금씩 자주 드시는 것이 필요해요.


4. 생리 전, 혹은 생리 중에 피로가 극심합니다. 

월경전증후군으로 심한 피로나 졸음을 호소하시는 분들은 꽤 많습니다. 자궁 내막에 울혈이 형성되거나 혹은 출혈이 빠져나가는 정도로도 피로를 심하게 느끼는 분들은 애초에 혈압이 떨어져 있는 분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심한 분들은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고 호소하시곤 합니다. 


5. 가슴이 쉽게 두근거리거나 답답합니다.

저혈압이란 말 그대로 심장이 혈액을 밀어 혈관벽에 부딪치는 압력이 약하다는 의미로 심장의 출력이 떨어질 수도 있고 혈액이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말초까지 혈액을 전달하는 힘이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심장의 박동수를 늘려 순환을 커버하려는 경우에 이유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심장의 과부하로 인해 답답해질 수 있습니다. 빈혈이 있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이런 경우 환자들은 '내가 공황장애인가' 하고 생각하시기도 합니다.


6. 저질체력입니다. 

체력을 말하는 지표는 여러 가지지만 저혈압이 있는 분들은 높은 확률로 체력이 약합니다. 강한 심폐활량을 요하는 운동과 맞지 않기 때문에 시도해 본 적조차 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남들은 운동하면 상쾌하고 체력이 좋아진다는데 저혈압이 심하면 조금만 과하게 운동해도 뻗어버립니다. 


그래도 운동은 필수! 시작은 요가나 필라테스처럼 심폐활량을 크게 요하지 않는 것부터 차차 유산소를 늘려가요.




     저혈압은 질환이 아니라 '체질'에 더 가까운 지표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다만 체질의 약한 부분이 어떻게 드러나는가에 따라 삶의 질은 크게 무너질 수 있지요. '혈허'는 건강에 문제가 생긴 여성의 경우 거의 빠짐없이 해당되는 진단입니다. 월경전증후군에도, 편두통에도, 만성피로에도 해당되는 경우가 많지요. 건강검진에서 괜찮다고 해도 실제로 괜찮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미리 인지하고 관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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