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울 거 없는 한의학 기초 용어 10개
*여기에 쓰는 글은 한의계를 대표하는 입장이 전혀 아니며 저의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다만 검증된 내용,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쓰려고 노력합니다.
기가 허하시네요.
간의 기혈을 보해야 합니다.
음허가 심해서 상열이 있으시군요.
... 한의사 양반, 당최 그게 다 무슨 소리요?
한의원에 가서 내가 뭐때문에 아픈건지, 어떻게 하면 낫는 건지 설명을 들을 때 한의사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할 때가 있다. 사실 이건 한의사만 그런 건 아니고 의사나 변호사나 엔지니어나 아무튼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다 마찬가지다. '@#%@가 %^*%여서 @#%$^# 해야합니다'라는데 조사 말고는 무슨 얘긴지 모르겠다. 그러려니 하고 돌아설 때가 반, '그래서 그게 무슨 얘깁니까?'라고 물어봤다가 '그러니까 $^%$&해서 #$^@#@^ 하기 때문에 &^*&)^% 한다는 뜻입니다'같은 부연설명 같지 않은 부연설명만 듣고 돌아설 때가 반이다.
전문가는 해당분야의 비전문가에게 설명할 때 용어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많은 전문가들이 그 생각에 동의하는 듯 하다. 한데 한의학 용어는 친절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명쾌하게 설명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것이 많다. 한의학이 동양의 학문이고, 쓰여진 언어가 뜻글자인 한자여서 그런 것도 있겠다. 글자 하나하나에 단순한 사전적 의미 말고도 유구한 동양철학의 섭리가 다 담겨있는 식이라 자칫하면 설명이 분명하지도 않으면서 길어지기 일쑤다.
그래서 여기에 글을 써나가기 전에 한의학 생리병리 용어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다섯 쌍, 열 개의 한자를 먼저 설명하고 가려고 한다. 여기에서 개념을 동양철학으로 풀 생각은 없고그럴능력도 없다 실용적으로 인체에 적용할 수 있는 개념, 생활에서 직접 쓸 수 있는 개념으로 치환되는 부분 안에서 설명해보고자 한다. 이 열 개의 한자는 처음 한의대에 들어갔을 때 배운 글자이고, 한의학적 생리병리의 가나다에 해당한다. 앞으로는 어떤 한의사에게 설명을 들어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며.
설명할 다섯 쌍의 개념은 다음과 같다.
음양 陰陽 기혈 氣血 한열 寒熱 허실 虛實 보사 補瀉
음양 陰陽
'음양'은 음과 양으로 나눠서 대립되는 개념이다.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양방생리로 치환해서 설명해보자.
음 우리 몸의 체액 일체
혈액, 림프액, 각종 호르몬을 포함해서 세포내액, 세포외액까지 체내 기관 및 세포의 기능을 원활하게 하는 모든 액체로 이해하면 된다. 이를테면 '음허가 심하다'는 말은 몸의 체액이 부족하다는 뜻이 된다. 음허의 증상은 빈혈도 될 수 있고 피부의 건조도 될 수 있고 수면장애처럼 호르몬 및 신경전달물질의 부족도 될 수 있다. 개개의 물질을 아우르는 큰 개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양 몸의 체액(음)을 구동시키는 원동력
체액은 혼자 만들어지지도, 혼자 이동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어떤 힘에 의해 생성되고 추동되어야 의미가 있다. '양'은 넓은 의미에서 '음'을 활용해 생명현상을 존재하게 하는 생명력 자체라고 이해하면 된다. 인체를 이루는 성분을 죄다 한데 모아놓는다고 해서 곧 살아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 것은 '양'으로 대변되는 생명력이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일상적으로는 좁은 의미의 '양'을 더 많이 쓰는데, 좁은 의미의 양은 뒤에 설명할 '기혈'의 '기'와 흡사한 의미다. '양기가 떨어져서 보양식을 먹어야겠다'고 할 때의 '양', 즉 살아가는 데 쓰는 에너지, 당장 움직이는 데 필요한 기운을 말한다. 한의학에서도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가 혼용되어 사용된다.
기혈 氣血
'기혈'은 앞에 설명한 '음양'과 이어서 많이 쓰인다. '양기가 떨어졌습니다'라든가 '음혈을 보충해야합니다'라는 식이다. 다섯 쌍의 개념 중 가장 이해하기 쉬운 개념이 아닐까 한다.
기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에너지, 활동에 필요한 기운
기운이 떨어진다, 할 때의 기운으로 이해하는 게 가장 쉽다. 한의학에서는 전체의 기뿐 아니라 심장, 간, 위장 등 각각의 장기에도 각각의 기가 있다고 설명하는데, 이때에는 각 장기가 얼마나 활발하게 기능하고 있는지를 가늠하는 기준으로 생각하면 된다.
혈 혈액 및 혈액이 운반하는 산소 및 영양분의 역할까지 포괄하는 의미
혈액이다. 다만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 흐르고 있는 혈액이다.
한의학이 서양의학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한의학은 살아있지 않은 사람의 몸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서양의학은 해부학을 기반으로 발달했기 때문에 살아있지 않은 인체의 물성을 파악하는 것의 의미가 크다. 그래서 혈액도 혈액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고, 각각의 미시적인 기능을 파악하게 되었다. 하지만 한의학은 살아있는 몸을 흐르는 혈액 그 자체가 곧 '혈'이고, 그보다 더 작은 단위에는 큰 관심이 없다. 때문에 순수한 혈액 자체뿐 아니라 혈액이 운반하는 산소, 이산화탄소, 영양분, 노폐물을 모두 '혈'로 파악하고 몸에서 일으키는 작용 그 자체에 주목한다.
기혈은 음양보다 좁은 의미로 쓰이고, 몸이 안좋을 때 음양보다 먼저 소진된다. 기가 양의 일부이고 혈이 음의 일부이기 때문에 기허는 양허보다, 혈허는 음허보다 가벼운 병증이고 치료하기도 수월하다.
한열 寒熱
앞의 '음양'과 '기혈'이 한방의 생리적 개념이었다면 '한열'은 가장 기본적인 한방병리의 개념이다. 말 그대로 몸의 차고 뜨거움인데, 체온계로 잴 수 있는 체온과는 전혀 다르다는 게 포인트다.
한 차가운 기운, 또는 그 기운이 몸에 들어왔을 때 몸이 느끼는 자각 증상
'한'은 외부에서 침입하는 기운과 내부의 자각증상 두 가지를 동시에 반영한다. 한의학에서 '사기(邪氣)' 또는 병리개념 뒤에 '사(邪)' 한글자만 붙여서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사, 열사, 풍사 등등) 모두 '외부에서 들어온 병의 기운'을 의미한다. '한사(寒邪)를 맞아 상한(傷寒) 증상을 보인다'라고 하면 '찬바람 쐬서 감기걸렸어'의 한의학적 표현인 셈이다.
한편 자각증상에도 '한'이라는 글자를 쓴다. 대표적인 게 감기 초기에 괜히 추운 것같이 으슬으슬하게 느끼는 증상, '오한(惡寒)'이다. 한자 뜻 그대로 풀이하면 '찬 것을 싫어한다'는 뜻이지만 오한은 꼭 외부 온도가 차가워야만 나타나는 증상도 아니다. 실제로 찬 기운도 '한'이지만 내가 차다고 느끼는 것, 내 몸이 찬 것으로 인식하는 것을 모두 '한'이라고 한다.
열 뜨거운 기운, 또는 스스로가 뜨겁다고 느끼는 자각 증상
'열'은 '한'의 반대 개념이자 동등한 선상에서 이해하면 된다. 외부의 '열기'와 인체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경우의 '열'을 모두 포괄한다.
'열'은 '한'보다 널리 쓰인다(열이 난다, 열병이 났다 등등). 실제 체온이 올라가는 '열'과는 범위에 미세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 말라리아(한의학에서는 학질이라고 한다)와 같은 감염병에 걸려 고열에 시달리는 것도 '열'이고(이때는 말라리아 원충이 외부에서 들어온 '열사(熱邪)'가 되겠다), 갱년기에 얼굴로 화끈거리는 열감이 올라오는 것도 '열'이다. 특이한 점은 자각증상이 포함된다는 것, 몸의 일부에만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허실 虛實
'허실'은 한의학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병리 개념이다. 중요한 것은 동양의학의 특징적인 '허'의 개념이다.
허 인체를 이루는 물질과 기운이 모두 부족한 상태, 대표적으로 면역력 저하
동의보감에 실려있는 질병은 수천가지지만 모든 질병은 딱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왜 병에 걸렸는가'에 따라 '정허(正虛)' 아니면 '사실(邪實)'이다.
정허(正虛) 내 몸이 원래 가지고 있어야 하는 기운과 외부에 대한 방어력이 충분히 갖춰져 있는가
사실(邪實) 병증을 일으키는 외적 요인이 내 몸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가
감기에 걸린 사람이 있다. 감기의 원인은 현대의학이 밝혀냈듯이 바이러스다. 감기에 걸리면 우리는 1)증상을 완화할 수 있는 여러 약(콧물약, 기침약, 해열제)을 먹은 다음 2)푹 쉰다. 이 중 감기에 대한 치료는 1)번일까, 2)번일까? 한의학적 관점에서는 둘 다 치료이고, 때로는 오히려 2)번이 더 중요한 치료일 수도 있다. 외부요인뿐 아니라 내 면역력의 저하인 '정허' 또한 중요한 원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허하다는 것은 단지 면역력만의 얘기는 아니다. '요즘 몸이 허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왜 그렇게 느끼냐고 물어보면 답은 다양하다.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요. 일할 때 기운이 없어요. 오후에 너무 졸려요. 잘 때 식은땀을 흘려요. 안색이 안좋고 머릿결이 푸석푸석해요. 즉 내 몸에 필요한 기, 혈이 모두 부족한 상태이다.
앞의 말과 단짝을 이루는 말로는 '보양식이라도 먹어야겠어'가 있겠다. '허하면 양기를 보해야 한다'는 순리를 이미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문장에 오늘 설명한 개념이 네 개나 들어있다.
실 외부에 존재하는 병의 원인이 내 몸에 영향을 미친 상태
위에 설명한 병을 일으키는 외적 요인, 즉 춥고 덥고 건조한 기후, 세균이나 바이러스같은 감염원, 각종 오염물질 따위가 내 몸에 영향을 일으킨 상태이다. 주로 서양의학에서 치료의 대상으로 삼아온 병인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한편 허실을 병인과 연결해서 쓸 때는 '가짜와 진짜'의 개념으로 쓰기도 한다. 갱년기의 열과 같은 '음허'로 인한 가짜열을 '허열'이라고 하고, 말라리아로 인해 실제로 발생하는 고열을 '실열'이라고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보사 補瀉
'보사'는 '허실'이라는 병리와 연결해서 이해해야 한다. 다섯 쌍의 개념 중 유일하게 '치료 방식'에 대한 개념이다.
보 허한 것, 즉 내 몸에 부족한 어떤 것을 채우는 치료
흔히 '한약이나 보약이나'라고 말씀하시는 분을 많이 본다. '보약'이라는 단어에는 왠지 치료약이 아니라는 뉘앙스가 섞여있다. 과거 제대로 먹지 못하고 기운이 부족했던 시절에는 대부분의 치료 한약이 '보약'이었다. 건강한 면역이라면 쉽게 이겨낼 일도 기운이 달려 이겨내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였으니까. 보약은 사치품이 아니라 '정허'와 '사실'에 근거해 '정허'가 더 큰 문제라고 생각될 때 쓰는 치료이다.
사 몸에 쌓인 안좋은 물질, 탁한 기운을 내보내려는 치료
'사'하는 치료는 몸에서 안좋은 내용물을 강하게 내보내려는 치료이다. 몸에서 뭔가가 나가는 통로는 생각보다 많지 않은데, 땀을 내거나, 대소변을 누거나, 간혹 토하거나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요즘처럼 영양과잉의 시대에는 함부로 '보'하면 안되는 질환도 많다. 그럴 때는 '사약'을 써야 한다. '죽을 사 死' 가 아니라 '쏟을 사, 게워낼 사 瀉'자를 쓴다.
인체는 너무 복잡해서 병에도 '허하냐 실하냐'가 섞여있는 경우가 많다. 선후와 경중을 따져서 치료 순서를 정해야 한다. 그래서 보약에도 '사하는 약재'가 조금씩 들어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유명한 보약 중 하나인 '육미지황탕'은 간과 신장의 음을 보하는 약재 3가지(숙지황, 산약, 산수유), 음허로 인해 생긴 허열을 사하는 약재 3가지(목단피, 복령, 택사) 총 6개의 약재로 구성된다. 3보3사라고 한다.
2017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