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전쟁, 두 개의 컨트롤타워
*여기에 쓰는 글은 한의계를 대표하는 입장이 전혀 아니며 저의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다만 검증된 내용,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쓰려고 노력합니다.
그 의사는 왜 한약을 먹지 말라고 했을까
진료하다 종종 이런 얘기를 듣는다. "그런데 제가 다니는 병원 의사 선생님이 한약을 먹지 말라고 해서요." 이런 얘기를 '가끔'만 듣는 이유는 그런 얘기를 들으면 대부분은 아예 한의원에 안 오기 때문일 거다(시무룩) 나는 대체로 환자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편이지만 의문은 남는다. 그 의사 선생님은 왜 한약을 먹지 말라고 했을까? 한약이라고 해도 다 성분이 다른데, 이를테면 '인삼'이나 '감초'를 먹지 말라고 했다면 이해가 되지만 '한약'을 통째로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전 같으면 한약이 무조건 간에 나쁘다거나 한약재의 간독성 얘기가 먼저 나왔을 것이다. 실제로 한약재의 간독성에 대한 연구는 치열하게 계속되고 있고 최근에는 한의원의 처방에 사용되는 모든 한약재가 식약처의 엄격한 검사를 거치기 때문에 중금속이나 농약 문제가 높은 타율로 걸러진다. 당연하지만 모든 한약이 무조건 간에 나쁜 게 아니다. 한약에 절대로 간독성이 없다는 뜻도 아니다. 한약이든 양약이든 처방과 용량과 복용하는 사람에 따라 간에 나쁠 수도 있고 반대로 간질환을 치료할 수도 있다. 적어도 지금 시대에 한약을 먹지 말라고 했다면 그러한 무조건적 한약 폄하가 이유는 아닐 거라는 얘기기대다.
예전에 수면유도제인 졸피뎀 과다복용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는 기사가 난 적이 있다. 사실 졸피뎀 자체는 처방에 따라먹기만 하면 큰 문제가 없는 약이라고 한다. 문제가 된 건 한 환자가 여러 병원을 돌며 중복 처방받은 졸피뎀을 과량 복용해서였다. 이 경우 환자가 과거에 어떤 약을 처방받았는지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면 각각 환자의 증상을 보고 졸피뎀을 처방한 의사 각각에게는 양심의 문제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걸 때려먹은 환자는 자살을 시도하거나 몽유병에 시달렸고 실제로 자살에 성공(...) 하기도 했다.
같은 의사 선생님끼리도 내가 모르는 처방을 다른 의사가 했다면 함께 먹어도 된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약은 졸피뎀처럼 용량 대비 효과를 내는 것이 많고 병용효과도 있기 때문에 함께 복용하면 안 되는 성분들이 있다. 의사가 한약을 먹지 말라고 했다면 그건 아마도 한약이 그의 통제 밖에 있는 처방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환자에게 어떤 약을 처방했다면 한약이 처방한 약과 병용되었을 때 어떤 작용을 일으킬지 가늠이 안 되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에 진짜 이유가 있다.
전쟁은 하나인데 컨트롤 타워가 두 개일 때
우리나라는 의사와 한의사가 있고 둘 다 국가고시를 통과해서 나라에서 자격증을 받는 의료인이다. 이원화된 의료체계인 셈인데 세계 어디에도 이런 경우는 사실 드물다. 있다면 중국 정도고 중국에는 우리의 의사와 한의사처럼 서의와 중의가 공존한다. 차이가 있다면 중국의 의료체계 핵심은 '중체서용(中體西用)', 즉 진단이나 병리 파악은 중의학적으로 하고 필요에 따라 양약을 병행하는 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의사가 거의 대부분의 환자를 커버하고 양약과 한약을 모두 처방할 수 있다.
가까운 일본은 어떨까? 일본에는 의사만 있고 한의사가 아예 없다. 그러나 중국, 미국에 이어 한의학이 무척 발전된 나라 중 하나이며 논문 발표를 통한 한약 연구가 가장 활발한 곳이기도 하다. 일본의 의사는 한의학을 전공과목 중 하나로 공부하며 전체 의사의 83.5%(2013년도 기준)가 전문의약품으로써 한약을 처방한다. 일본 최대의 한방제약회사인 '쯔무라'는 연간 매출 1조 원이 넘는다. 의사가 한약을 처방하기 때문에 양약과 한약의 병용효과나 현대의학적 시술과 한약을 병행했을 때의 효과와 부작용을 두루 파악하기 쉽다.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의사와 한의사 사이 귀속 관계가 없다. 표면적으로는 동등한 지위이며 의도치 않게 대립하는 형국이다. 같은 병에 대해 서로 의논하지 않고 각자의 치료법, 각자의 처방을 내놓는 각자의 우주를 형성하고 있다. 양한방 협진을 표방하는 곳도 종종 있지만 진단과 검사는 기계를 활용하고 치료에 한의학적인 방식을 쓰는 방식에 머물 뿐 대세에 영향을 줄 만한 적극적이고 발전적인 공조는 거의 전무한 형편이다. 전쟁으로 치자면 질병과의 전투는 하나인데 작전을 지시하는 컨트롤타워는 두 개인 셈이다. 각 수장은 서로의 전략을 두고 소통하지 않는다심지어 대립한다.
사실 대한민국의 의료체계에서는 필수재로서나 공급의 규모에서나 의료보험 재정 내에서의 지분으로나 현대의학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상호 동등한 지위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뜻이다. 정말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의 전문성으로 맞서는 관계라면 한쪽이 라이선스를 가지고 행한 의료행위를 다른 쪽이 일방적으로 무시하긴 어려울 것이다. 대립의 구도만큼이나 상호 역학관계가 이 상황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화해의 여지는 존재하는가
수년 전부터 한의학의 추세도 EBM(Evidence-based Medicine, 근거기반 의학)을 따르고 있다. 임상에서 효과를 보인 한약 처방은 정량화할 수 있는 효과를 검증받아 속속 신약의 형태로 출시되고 있다 그런데 그 처방권은 의사에게 있다는 아이러니. 한의대에서도 해부학, 생리학, 약리학, 영상 진단학을 전공과목으로 배우고 한의학연구소와 각 대학의 연구팀에서 끊임없이 질환별 진단의 프로토콜을 세워나가고 있다. 일부 의학전문대에서는 '대체의학'에 관심을 갖고 한의학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며 학문적인 교류의 장을 열어둔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구조적인 불균형을 해소하기는 역부족이다. 그냥 멀기만 한 건지, 기다려봐도 아예 불가능한 일인지 감도 오지 않는다.
한의사로서 한약, 한의학적 치료, 한의학이 인체를 바라보는 세계관에 두루 자부심이 있지만 냉정하게 보면 역시 우리나라의 한의학은 마이너다. 그것도 메이저가 손잡아주지 않고 등을 떠밀어버리는 마이너다. 국민 건강을 위해서는 중국이나 일본처럼 양쪽의 장점만을 뽑아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생각은 서글프지만 메이저 쪽에서 나설 때 더 실현의 가능성이 있다. 가끔 의료일원화에 대한 논의가 있기도 한데 의사는 의사의 이유로, 한의사는 한의사의 이유로 반대하고 나선다. 결국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결론은 요원해 보인다.
사실 의사 선생님들은 한약에 큰 관심이 없다. 한약이 얼마나 좋은지 정확히 어떤 것이 나쁜지 관심조차 없다는 것이 팩트일 것이다. 바람은 한 가지뿐이다. 환자에게 한약을 먹지 말라고 말할 수 있지만 적어도 그 때 온당한 설명을 해주기를 바란다. 무조건 한약이 나빠서가 아니라 이 치료에 미치는 영향을 알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나는 의사라서 한약은 잘 모른다고, 한약은 한의사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말해주기를 바란다. 스스로의 진단과 치료에 자부심을 갖고 환자의 건강을 위해 진료하는 것은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니까.
한의사들에게도 과제는 남는다. 앞으로 한약 처방의 구성을 공개하는 것은 필수가 될 것이다 이 화제는 다시 다루겠습니다. 개별 약재에 대한 연구는 물론 약재들간의 병용 효과도 밝혀내야 한다. 하나의 처방이 몸에서 어떤 변화들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지 면밀히 파악하고 숙지해야 한다. 환자에게 개별 처방의 의미와 효과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부디 나를 찾는 환자들이 그것들을 기대하고 오기를 바란다. 끝없는 공부를 바탕으로 긴장감을 가지고 대답을 준비해 두겠다.
한의대 입학을 앞두고 오랜만에 만난 한 대학 동기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사실 한약이 효과가 있니? 풀뿌리 몇 개 달여 먹는다고 병이 낫는다는 게 말이 되니." 그 친구의 아버지는 의사였다. 설사 진짜 그렇게 생각을 했어도 그 생각을 굳이 내게 말할 필요가 있었을까. 화는 났지만 아직 한의대생도 되기 전이라 할 말도 없었다. 그 동기와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멀어졌지만 나의 일부는 지금까지도 그때 그 말과 싸우고 있다.
한의대에 다닐 때 선배들은 종종 '한의학의 미래는 밝은데 한의사의 미래는 어둡다'며 자조하곤 했다. 우리나라 한의대에는 십수 년에 걸쳐 가장 뛰어난 재원들이 공급되었지만 그 놀라운 인재풀을 갖추고도 양한방이 분리된 제도적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세계 무대에서 한의학 연구 성과로 잘 나가는 중국과 일본, 심지어 미국에도 뒤쳐지고 있지만 한 집안에서도 핍박받는 꼴이다. 선배들의 염세주의가 짜증났지만 그때도 아는 게 별로 없어서 할 말은 역시 많지 않았다.
나는 한의사의 미래가 어둡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똑똑한 동기 선후배들이 도전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나 역시 포기하지 않고 임상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의사와 한의사가 언제까지나 반목할 거라 생각하지도 않으며 국민 건강의 증진을 위해 모두가 노력하고 있다고 믿는다. 세계는 분명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고 우리만 예외일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