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애도

이미 사라진 사람의 목소리와 말과 몸짓을 잊지는 않으면서

by 김민율

마지막 애도



2021년 11월 30일 새벽 12시 55분. 아버지의 사망선고가 내려졌다. 나는 자꾸만 눈물이 쏟아졌고, 산소 공급 마스크를 쓰고 입을 반쯤 벌리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의사가 사망선고를 내리고 병실에서 나가자 간호사가 청각은 남아 있으니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하시라고 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가까이 다가가 귀에 대고 말했다. 많이 사랑한다고. 고마웠다고.

염습을 할 때는 얼마나 슬펐던지. 그 많은 눈물이 어디서 그렇게 많이 새어나오던지. 온몸이 눈물주머니인 것만 같았다. 너무 많이 쏟아져서 앞이 안 보일 정도였다. 장례지도사가 아버지에게 대마로 지은 수의를 입히고, 저승 가는 길에 신을 신발을 아들 딸들이 함께 신겨 드리게 했다. 이제 아버지는 영영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셨다. 우리는 둘러서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아버지의 장례가 끝난 후, 다음날 조카가 꿈을 꾸었다 했다. 민들레가 예뻐서 따서 가려는데 몸이 점점 조금씩 사라졌다고 했다. 눈을 떠보니 씨앗들이 엄청 있었고, 그 씨앗들이 자기한테 와서 도망갔다고 했다. 한참 달려가니 할아버지 머리처럼 하얀 민들레가 있었는데 그 민들레에는 불 수 있는 씨가 하나만 있었다고 했다. 그걸 만지니 민들레 속에서 씨앗 두 개가 다시 나와 할아버지 무덤 속으로 들어가 새싹이 나왔다고 했다. 다른 씨앗들도 다 나왔고, 잠시 후 잭과 콩나무 이야기에 나오는 콩나무처럼 엄청난 줄기가 자랐다고 했다. 조카는 거길 올라갔는데 할아버지가 계셔서 할아버지, 하고 부르며 뛰어가서 할아버지를 꼭 안아 주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웃고 계셨다고 했다. 남동생이 들려준 조카의 꿈 이야기를 전해 듣고 우리는 아버지가 좋은 곳에 가셨나 보다 했다.

아버지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게 실감이 안 났다. 아빠, 부르면 어디선가 나타날 것 같고, 아침 식탁 앞에 앉아 아침밥을 먹고 있으면 맞은편에 앉아 함께 아침밥을 드시는 아버지가 생각났다. 엄마도 그랬다. 고향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계실 것만 같고, 마당에 나와 거닐고 계실 것만 같다고 했다. 밥을 먹으려고 식탁 앞에 앉으면 마주 앉아 밥을 먹던 생각이 나서 엄마는 쟁반에 담아 거실에 앉아 천천히 드신다고 하였다. 겨울 내내 삶과 죽음이 뒤섞인 아버지의 빛과 그림자는 때때로 남은 자들의 삶에 어른거려 그리움을 자아냈다.


아버지의 입술이 점점 파래지는 날들이 늘어나고, 죽음에 가까워지자 아버지는 자주 아들에게 납골묘 이야기를 하셨더랬다. 죽으면 자신이 누울 자리를 준비하고 싶어 하셨다. 죽어서도 가족이 함께 모여 있을 수 있는 자리로 마련해 놓으라고 하셨는데, 남동생이 찾은 곳은 시안 가족 추모 공원이었다. 남동생은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회사 관련 할인도 되고 회사 사람들 대부분이 그곳에 가족의 묘 자리를 알아보고 미리 구매해 놓는다고 하여 선택한 곳이었다.

아버지는 강릉 고향땅에 묻히길 원하셨으나 산 어디쯤에 구입할 땅이 없었다. 아버지는 어느 정도 농지를 소유하고 계셨으나 자신이 묻힐 땅을 구하려고 시내에 사는 산 주인에게 전화도 걸어 봤으나 팔지를 않았다.

아버지는 불이 무섭다고 하셨다. 그래서 화장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으나, 차츰 생각이 바뀌셨다. 고조 할아버지, 할아버지도 고향 땅에 묻혔지만, 산이 험하고 관리하기도 어려워 가까운 시일 내에 큰 집에서 화장을 하여 가족 납골묘로 모실 거라고 하였다. 시대의 흐름이 그랬다. 이제는 산소를 쓰기 보다는 화장을 하거나 수목장을 치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조상 묘를 파묘해 화장한 후 납골묘에 모시는 시대였다. 때문에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곧 고조 할아버지 고조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할머니 묘를 가족 납골당으로 함께 모실 거였다. 아버지 또한 가족을 중시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족 납골묘를 알아보라고 이르셨다.

아버지가 묻힐 납골묘 자리는 8명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어느 날 엄마가 내게 말했다.

“아빠는 그런데 원해. 가족들 나중에 죽으면 같이 모여 있는 데로 하고 싶어해.”

“엄마 거기 누가 들어가는데?”

“아빠랑 나랑. 그리고 나중에 누구나 한 번은 죽으니 남길이도 거기로 올 테고. 그 밑으로 자손들이 또 오겠지. 너도 결혼 안 하면 거기로 와야지 뭐. 시집 간 딸들은 남편 따라 가면 되는 거고.”

“그래? 거기 내 자리도 있는 거야?”

나 죽어서 가는 자리도 마련해 둔다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날 나는 내 미래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언젠가는 나의 젊은 육체도 늙고 병들어 숨을 거두고, 가장 고요한 존재의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 침대에 누워 완전히 홀로인 상태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는 것. 그 때가 오면 홀로 떠나는 나를 위해 따뜻하게 배웅해주는 이에게 나는 무엇을, 어떤 기억을 주고 갈 수 있을까. 나는 죽어서 아버지가 안치된 납골묘 자리에 함께 있게 될까.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게 될까.

임종 시 아버지의 곁에는 엄마와 우리 5남매가 있었다. 아버지는 홀로 가셨지만 그리 쓸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망인이 돼버린 엄마와 남겨진 우리에게는 커다란 눈물 구멍이 생겨났지만.

가족이라는 운명으로 엮여 있다 언젠가는 작별하게 될, 죽음들이 함께 있게 될 자리는 따뜻했다. 납골묘 자리는 양지였고, 앞이 탁 트인 곳이라 아버지가 답답해 하지 않고 잘 계실 곳 같다고 생각했다. 엄마도 사람들과 얘기하길 좋아하는 아버지가 심심하지는 않겠다고 하셨다. 이제 여기서 혼자 계셔야 되지만, 주변에 영혼들도 많으니 잘 계실 거라고 했다.

엄마는 아버지의 긴 병과 돌봄을 가끔 지쳐하셨지만, 아버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인내하셨다. 어느 날 엄마가 슬프고 우스운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떤 할머니가 있는데, 남편이 암 걸려서 죽게 생겼는데 명줄이 긴지 수술하고 또 수술하고 할 때마다 죽어서 나왔으면 했대. 하도 긴 병 치레를 해서 지겨워서 빨리 죽었으면 했대. 근데, 수술하고 회복실에서 나올 때마다 손을 흔들고 나오더래. 나 살았다고. 그래서 그 할머니가 어휴, 죽지도 않는다고 궁시렁 거렸는데. 어느 날 보니 연락이 없어. 그래서 내가 전화해 봤더니 교통 사고로 6개월 병원 생활 했대. 할아범 죽으라, 죽으라 했다가 자기가 먼저 갈 뻔 했다고.”

엄마와 나는 그 할머니 얘기하면서 그 할머니가 얼마나 웃기고 슬픈지 한참 웃었더랬다. 웃으면서도 아픈 사람 두고 내가 이렇게 웃어도 되나, 하시며 엄마는 죄책감이 들어 하셨다. 엄마는 가끔 그런 날들이 있다고 하셨다. 아버지와 웃긴 드라마를 보다가 그만 엄마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는데 괜히 웃고 나니 아버지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음 번에는 웃을 일이 있으면 꾹 참아버렸다고 하셨다.

삶과 죽음 속에 내던져진 인간의 웃음이란, 슬픔이란 무엇일까? 웃음에도 윤리가 있는 걸까? 가끔 엄마는 웃음과 슬픔이 가진 윤리 의식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런 엄마의 윤리 의식은 나에게도 전염되었다. 나는 잘 웃는 편이었지만, 병환 중인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쩌다 웃는 게 죄스러워지는 날들도 있었다. 웃어도 되는 상황에서 웃음은 아무런 죄가 되지 않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그 상황이 웃어도 되는 상황일지라도 아픈 사람 앞에서의 웃음은 죄책감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인간이 처한 상황은 복잡했고, 엄마도 나도 이러한 상황과 내면의 진실이 무엇인지, 우리의 부끄러움까지도 이해해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넉 달이 지난 어느 날, 고향집에 홀로 계시는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 체리낭그 죽었어. 남들은 꽃이 다 폈다는데 왜 이러나 했더니 죽은 게 맞네야. 왜 죽었지? 그기?”

“그러게. 왜 죽었어?”

“작년에 꽃이 피어 가지고서네.”

“체리도 많이 달리지 않았어?”

“작년에 한 이십 몇 개 따 먹었지. 근데 아빠가 작년에 그러더라. 내년엔 좀 많이 달리겠지 이래던데 글쎄. 그것도 죽었냐. 낭그가 꽤 커. 올해는 좀 달리나 했더니. 기대가 크면 실망도 커요. 난 그래도 좀 있으면 피겠지. 그러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큰 엄마가 아까 와 보더니 야, 이 낭그 죽었다. 우린 하마 꽃이 다 폈는데. 이러더라고. 돈용이 집도 물어 보니까 하마 다 폈다던데. 아까워 죽겠네. 그럴 줄 알았으면 봄에 일찌감치 또 하나 심을 걸 그랬네.”

“왜 죽었지?”

“모르겠어. 왜 죽었는지. 아빠가 작년에 물을 자꾸 퍼붓더니 그래 그렇나. 단감나무도 죽었을까봐 겁이 났는데. 단감나무는 그래도 잎이 나오더라고. 단감도 맛있어. 단감도 아주 크더라고.”

“단감나무도 하나만 심지 않았어?”

“한 대씩만 심었어. 앞에 따개 감나무 한 대 곶감 나무 한 대 있고 저쪽에 대봉나무 한 대 있고. 그만하면 실컷 먹어. 복숭아 나무도 오래되니 이젠 한쪽 낭그도 다 죽는다야. 가을에 규래 애비 오면 좀 베제키라 해야지. 그러고 내년 봄에 하나 더 사다 심던지 해야지. 좀 큰 거 사다 심어야지. 아이, 체리낭그 아까워 죽겠네.”

“체리나무 몇 년 키웠는데?”

“체리낭그 저게 올해 4년 째지. 컸다니까. 잘 크더라고.”

“거름을 좀 줘보지.”

“안 돼. 저 공군 집도 올해 하나 사왔는데. 큰 거 사왔더라고. 근데 이게 죽는 것 같애요. 그러면서 뭐 이제 심었으니. 잎사귀 시들시들하더라고. 그래도 난 우리 거 생각도 안 했잖아. 나, 참 천치야. 이래 보면. 아니, 그거 사왔는데. 잎사귀 그렇게 나왔는데. 우리 거 싹이 안 나왔는데 왜 그러고 맨날 쳐다만 보고 있냐고. 참 딱해 죽겠네.”

“딴 거는 잎이 나왔을 거 아니야?”

“응. 다 잎이 나왔지. 자두나무도 꽃이 하얗게 피었단 말이야. 근데 그걸 생각을 안 하고 왜 여기서 자꾸 싹이 안 나오나 맨날 뒤다 보고만 있었잖아. 아이구, 참 나도 딱해요. 거름을 줘도 되지 안 해. 거름도 봄에 줬지. 내가. 근데 낭그 부러뜨려 보니까 낭그 속이 아직 마르지는 않았어. 그냥 놔도 봐야지. 싹이 나오면 내년에 살아날려나. 아유 참. 큰 낭근데 왜 그리 죽었지. 그 아까운 게.”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체리나무도 죽는 것 같다고 하였다. 석 달은 마당에 나가기만 하면 눈물이 쏟아지고 환장하겠더니 경운기도 다 없애니까 좀 덜해졌다고 하셨지만, 어제도 쟁기통 보니 또 눈물이 쏟아졌다고 하였다. 소나무도 밭가에 있는 거 하나가 응달질 것 같아서 베어냈으면 좋겠는데, 아버지가 그걸 키우느라고 맨날 물 퍼다 준 걸 생각하니 못 베내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아버지가 남기고 간 빛과 그림자가 엄마에게 스며들어 흐려지는 시간이 오고, 엄마는 다시 남은 몫의 삶을 준비하듯 체리나무의 빛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엄마가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는 방식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애도가 가장 충만했던 때를 지나 다시 살기 시작하면 슬픔은 조금 옅어지지만, 완전히 마르지는 않았다. 가끔씩 늦은 밤에 다리미질을 하다가 문득, 아버지가 그리워 울컥, 하며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날도 있었다. 나의 애도 기간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애도 기간이 길수록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의 길이도 길어졌다. 슬프면 슬픈 대로 그리우면 그리운 대로 그렇게 이번 생에 스며들어 죽음을 받아 들이고 살았다.

나는 내게 주어진 몫의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었다. 아직 내게는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곁에 있고, 어떤 아름다움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이제 이곳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로움과 부재를 견디며 잘 살아가겠다는 삶에의 의지와 약속을 지키면서. 생의 모든 것들을 지켜내기 위해, 남아 있는 생을 더 잘 사랑하기 위해 용기를 내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그렇게 살아남은 자의 시간은 흘러가고 모든 것들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간다. 조금씩 슬픔이 치료가 되어가는 과정을 지나면서. 그러나 이미 사라진 사람의 목소리와 말과 몸짓을 잊지는 않으면서. 그것이 남은 자가 죽은 자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애도였다.




* 제 글을 읽어 주시는 분들께


안녕하세요.

브런치북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서툴고 부족한 부분이 많네요.

제 브런치북 <숨, 그 아름다운 열망> 제목이 다른 작가 분 브런치북 제목과 비슷한 걸 발견하게 되었는데,

고민하다가 제목을 <내 생애 아름다움을 찾아서>로 바꾸기로 하였습니다.

혼란을 드려서 죄송하고, 조용히 오셔서 읽어 주시는 분들, 발자국 남겨 주시고 가시는 분들께 깊은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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