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by 주드

하루 종일 온 세상을 탐험하며 다니느라 바빠서 잠들 때에서야 엄마가 생각나던 두 살 터울 위 오빠와는 달리, 나의 딸은 엄마 품에서 떠날 줄 모르는 아기였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엄마 무릎 위에 앉아, 엄마 옆에 누워, 엄마 등에 자기 등을 붙이고, 언제든 손 뻗으면 엄마가 닿을 곳에서, 늘 책을 보았다.


갓난아기였을 때부터 글을 깨치기 전인 예닐곱 살에도, 그리고 스스로 더 많은 책들을 읽어내고 싶어져서 더 이상 엄마에게 책을 들고 오지 않기 시작한 열 살 무렵까지 아이에게 많은 책을 읽어주었다. 아름다운 그림책부터 기발한 구조의 입체북, 삽화가 많이 들어간 동화책, 여러 분야의 전집... 아이는 엄마의 목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인 채 한 쪽 한 쪽 아주 작은 그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찬찬히 살폈다. 이만하면 됐다고 느껴지면 그제야 다음 장을 넘기곤 했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던 외출 장소는 당연하게도 도서관이었다. 집 근처에 걸어갈 수 있는 작은 도서관이 하나 있다. 장서량이 많지 않지만 짧은 오후시간에 가볍게 다녀오기에 좋았다. 도서관 옆에 아름다운 녹지가 있어 아이와 손을 잡고 걷는 것으로도 나는 충분히 좋았다. 어느 가을날 오후, 여덟 살이 된 아이와 여느 때처럼 도서관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파트 건물들 사이로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고, 단풍이 든 나무들은 온몸으로 빛을 발했다. 아이는 눈부신 빛 한가운데로 들어가서는 웅크리고 앉아 부드럽게 빛바랜 잔디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을 사진으로 남겼다. 이십여 분 정도 흘렀을까. 갑자기 햇살이 사라졌다. 태양이 아파트 뒤편으로 넘어간 것이었다. 여전히 단풍은 아름다웠지만 마법은 끝났다고 느꼈다.


그러고 일 년이 흘렀다. 그날도 아이와 도서관에 가는 길이었다. 어느 지점에 이르자, 갑자기 낯익은 풍경이 펼쳐졌다. 누군가 황금빛 향유를 부어놓은 것 같았다. 단풍 든 나무들이 찬란하게 빛을 내었다. 오후 3시, 바로 지난 가을 그날과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다시 마법의 공간이 열린 것이었다. 나는 아이에게 작년에 웅크리고 잔디를 만지작거렸던 그 위치로 가서 같은 자세를 취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고 사진으로 남겼다.

짐작하겠지만, 그 다음 해에도, 또 그 다음 해에도, 우리는 완연한 가을날 오후 3시면 설레는 마음으로 그곳으로 서둘러 갔고, 어김없이 마법이 펼쳐지는 그 순간을 사진으로 담았다.


그리고 올해, 다섯 번째 가을이 되었다. 이미 늦가을에 접어들었는데 아직 사진을 남기지 못했다. 조금씩 일을 시작해서 아이와 함께하는 오후 시간이 사라져 버린 때문이기도 하고, 언젠가부터 엄마 잠옷을 제 옷처럼 맞게 입기 시작한 아이와 말다툼을 자주 하게 된 때문이기도 했다. 말 그대로 그저 말다툼이었다. 서로 얼굴 붉혔다가 진정하고 나면, 서로 상대방이 짠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지난 주말, 도서관 옆 공원을 지나다가 화들짝 놀랐다. 내가 그 자리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익숙한 방향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태양은 아파트 건물 뒤로 반쯤 몸을 가리고 있었다. 아마도 십여 분 전에 우리의 마법의 순간이 다녀갔을 게 틀림없었다. 다급하게 아이를 데리러 집으로 다시 뛰어가려다가 멈췄다. 단풍 빛은 이미 시들어 있었다. 아이는 음악을 듣거나, 수학 숙제를 하고 있을 것이었다. 부르러 갔다가 혹여 아이의 무심한 눈빛이라도 보게 될까 봐, 나는 그냥 그 자리에서 헛헛함을 견디는 쪽을 선택했다.


오늘 아침, 아이가 등교를 준비하던 아이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엄마, 오늘은 꼭 사진 찍어야 돼! 오늘은 금요일, 내가 일하러 가지 않는 요일이다. 아이는 기억하고 있었다. 자기대로 바쁜 생활 속에서 깜박하면서 몇 번의 오후 3시를 놓쳤다가 오늘 아침, 어쩌면 올 가을의 마지막 기회라고도 할 수 있는 순간에 다시 기억을 해낸 것이다. 응, 그러자! 오늘 꼭 사진 찍자!


조금 있으면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다. 다행히 비 소식은 없다. 창밖을 내다본다. 햇살이 기대만큼 짱짱하지는 않다. 그런데 아쉬운 마음이 들지 않는다. 햇살이 없더라도, 빗방울이 떨어지더라도, 아이와 함께 그곳을 다시 가본다는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좋다. ‘그 시각, 그 장소’가 아니면 어떠한가. 마법이란 원래 뜻하지 않는 시각, 우연히 밟게 된 장소에서 일어나는 것 아니겠는가. 한결같은 마음, 한결같은 소망이 함께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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