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수많은 모습의 ‘사랑’이 있다. 때와 장소와 상대에 따라 다른 형태와 성격으로로 존재한다. 그렇다. 사랑은 분명 존재한다고 우리는 믿는다. 그러나 이 감정이 정말 사랑인지 아닌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같은 시공간에서 서로 주고받은 감정이었음에도 그것이 항상 동질적인 것이었는지는 장담할 수 없고, 때로 이 감정은 일방적인 노력이나 폭력이 되기도 하며, 한때 사랑이었다고 정의되었던 것이 시간이 흘러 부정되기도 한다. 사랑은 아니었다고. 그럼에도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다. ‘사랑은 실재하는 감정’이라고.
‘슬픔’ 역시 실재하는 감정이다. 슬픔 또한 수많은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사랑과 달리 슬픔은 이 감정이 진짜인지 아닌지 증명할 필요가 없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이유에서 비롯된 것인지 상관없이, 슬픔은 오판의 여지가 없는 확실하고 명백한 감정이다. 사람들은 슬픔을 숨길 수는 있어도 슬픔을 다른 것과 헷갈리지 않는다. 슬픔의 이유는 주관적이어도 슬픔의 존재는 객관적이다. 고통의 기준은 달라도 고통은 늘 존재해왔으며 슬픔은 고통을 따르는 그림자였다. 슬픔은 인간이 느끼는 가장 최초의 감정이었을 것이다. 탄생에는 늘 고통이 수반하는 것일지니.
‘사랑’의 정체성은 바로 이 ‘슬픔’의 감정에서 헤아릴 수 있다. 누군가 또는 무언가에 ‘슬픔’을 느끼는 것은 그 누군가 또는 그것에 애정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슬픔’의 감정은 ‘사랑’이라는 감정의 반증일 뿐 아니라 그것을 극대화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아이가 반짝반짝 빛날 때보다 아이가 아프거나 어려움을 겪을 때 어미는 더 큰 감정의 출렁임을 느낀다. 그 출렁임은 다름 아닌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반동이며 대가인 것이다. 어느 가수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라는 곡은 이를 잘 설명해준다. 사랑으로 인한 감정의 격랑과 지불해야 하는 고통의 값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사랑을 부인하고자 처절히 몸부림치지만 그럴수록 이 모든 슬픔의 근원은 바로 사랑임에 틀림없음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슬픔은 연민이나 동정심과는 다르다. 연민이나 동정심이 타인의 시선 안에서 존재하는 감정이라면 슬픔은 그 대상과 내가 일체화되어 일어나는 감정이다. 누군가의 죽음에 안타까움을 느낀다면 그 사람에 대해 호의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그의 죽음에 슬픔을 느낀다면 우리는 그를 사랑했기 때문인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리 없다고 냉소하지 말지어다. 갑자기 하루아침에 찾아오는 것이 사랑. 그 사랑을 목 놓아 부르다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 사랑을 울리는 진짜 슬픔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