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드 Sep 23. 2022

윤동주문학관

아이들 등교하고 바로 나섰는데도
자꾸 정신이 한 곳으로 팔려서
지하철 역 지나치고 버스 놓치고
외국인 관광객처럼 헤매다가
간신히 이르렀습니다.
자하문 고개, 윤동주문학관.

코로나가 창궐하기 직전
연극 무대에 단역으로 선 적이 있습니다.
사랑에 빠진 문학청년 역이었고
연인에게 시를 하나 읊어주었습니다.
그때 내 손에 들린 시집이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고,
내가 읊은 시는 <자화상>이었습니다.
그 작품에서 모든 배우가 춤을 추는 앙상블이 있었는데 장사익의 <자화상>이 배경음악으로 흘렀습니다.

그해 공연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고
윤동주는 정지용과 더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되었습니다.
<자화상>은 나의 독백이며 고해의 시였습니다.

윤동주문학관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연대 안에 기념관 정도 있겠거니,
언젠가 가봐야겠다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곳에 이렇게 좋은 곳이 있었어요.

내게 주어진 시간은 짧았기에
나는 윤동주문학관과 그 앞 풍경만 보고 오는 것으로 오늘의 목표를 정했습니다.

윤동주문학관은 아주 작았습니다.
그렇지만 더 크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만성비염환자인 나는 계속 훌쩍였는데
다행히 수요일 오전이라 관람객이 거의 없었습니다.

전시실 가운데에 오래된 나무 널빤지로 된 전시물이 있었는데 윤동주 시인 생가에서 발굴된 우물의 일부였습니다.
<자화상>의 시상이 이 우물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명이 있었고
이 오래된 흔적을 보려고 이곳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무척 감격했습니다.
 
좁고 고즈넉한 길 하나 두고 창의문(자하문)이 있고, 그 옆으로 서울 한양도성 순성길이 시작되는 입구가 있습니다.
문학관 뒷동산에 ‘시인의 언덕’이 있고,
문학관을 지나 조금 더 걸어 올라가면
청운문학도서관이 있습니다.

네, 위치 파악하고 후루룩 둘러만 보고 와야 했습니다.
오는 길에 좀 덜 헤맸으면
청운문학도서관에서 30분은 더 앉아 있을 수 있었는데.
부암동 초입까지 조금 걸어내려왔는데
예쁜 까페와 와인도 마실 수 있는 곳으로 보이는 곳들을 눈앞에 두고ㅠㅠ
나는 지하철 역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다음에, 가까운 날에,
꼭 다시 올 수 있겠지요.
그때는 스케치북이랑 펜과 연필을 가져와도
마음이 급하지 않기를.
그때는 노을도 볼 수 있기를.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좋아요.

오늘도 좋았어요.
햇살도, 하늘 빛깔도, 바람도.
내 발걸음도 무척 가벼웠어요.

정말 좋았어요.

.

작가의 이전글 재채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