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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드 Sep 29. 2022

나그네의 은빛수첩

이영훈 작곡가가 살아생전 늘 품에 끼고 다니던 책이라고 해서, 중고서점을 뒤져 구매한 책이 오늘 도착했습니다.
<나그네의 은빛수첩>.

아무런 정보 없이 손에 넣었는데
서문을 읽어보니 박목월 시인의 유고 수필집인 듯합니다.
무려 87년도에 인쇄되었고,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건재했던 문학전문 출판사인 ‘고려원’에서 출간한 책이네요.
(‘고려원’에서 출간한 소설 <닥터 지바고>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책 맨 뒷장에 ‘1991’이라는 숫자와 함께
흘려 쓴 한자가 적혀 있는데 정확히 알아보기가 힘듭니다.
첫 번째 한자는 ‘가득하다’는 뜻의 ‘충(充)’처럼 보입니다.
두 번째 글자는 도저히 짐작이 되지 않습니다.
궁금해 죽을 것 같습니다.
이 책의 소유자는 누구였을까.
어쩐 이유로 이 책을 중고로 내놨을까.

하루 종일 부엌 한편에 두었다가,
밤이 으슥해져서야 첫 두어 장을 읽어봅니다.
아, 나는 정말 귀한 책을 찾은 것 같습니다.
너무나 아름답고 따뜻하고 고전적인 문장들입니다.
내가 쓰고 싶은 문장들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렇다 하여, 이것이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돈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이 깊은 밤에 잠을 자지 않고 나는 글을 써야 하느냐, 대답할 말이 없다. 부질없는 나의 집념. 어리석은 나의 성의. 하지만 이 모든 작업이 부질없고 속절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이 깊은 밤의 형언할 수 없는 정적과, 써가는 글이 막힐 때마다 귀를 기울이게 되는 정적의 깊이만은 나의 것이다.”

이 순간 내가 느끼는 이 정적이
바로 시인이 말한 그 정적과 같은 종류의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나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동시에 한없이 경건(?)해집니다.
이영훈 작곡가는 이 글귀를 읽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또한 이처럼 깊이 있는 밤의 정적을 느낀 자에게만 베풀어지는 차분하고 고요하고 정숙한 것이 나의 핏줄 속에 스며들어, 내일의 나의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질 수 있으며, 나의 음성이 한결 조용해질 수 있으며, 나의 맥박이 한결 잔잔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글을 쓰는 나의 보람이 비록 현실적인 결실을 거두지 못하더라도 안타까울 것이 없다.”

바로 오늘 아침에도 있었던 나의 좌절에 대해서,
40년도 더 전에 작고한 시인의 글귀로
답을 받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자존감,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나는 왜 글을 쓰고자 할까요.

고민할수록 더 복잡해지기만 해서,
딱 한 가지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글 쓰기는 내가 살아있음을 깨닫는 유일한 길.’
많이 노력하고 있고 더디지만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약 40편의 글이 실려 있는데
조금씩 아껴서 읽을까 합니다.
그만큼 좋아요.

한 가지 문제가 있긴 합니다.
오래된 책이어서일까요.
재채기가 멈추지 않네요.
휴지가 수북하게 쌓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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