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 일기: 배영은 물과 하는 신뢰 게임

수영 기초반 이야기, 첫 달 수업

by 잼써

자세가 이상하고, 속도가 너무 느리고, 팔에 무리가 좀 가고, 숨쉬기를 2~3번 하면 리듬이 깨져 중간에 멈춰 가야 한다는 걸 제외한다면(다 중요한 거), "자유형을 할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예상보다 진도가 엄청 빨랐다. 한 6개월쯤은 지나야 레일 끝까지 자유형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말이다.


진도를 빨리 뺄 수 있었던 건 강사의 스파르타식 티칭 방법 덕분인 거 같다. 발차기에 좀 익숙해지려고 하면 팔 동작을 들어가고, 킥판을 좀 쓸 수 있게 되면 바로 킥판을 빼버렸다. 한 과정에서 오래 머물면, 다음 과정을 넘어갈 때 두려움이 더 커졌을 거 같다.


물론 아직까지 '왼팔을 좀 더 뻗어라, 고개 덜 들어라' 같은 피드백은 계속 듣고 있었다. 신경 쓸 걸 계속 생각하면서 몸으로 익혀야 할 거 같다.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니 한동안은 자유형에만 매진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킥판 없이 자유형을 고작 한두 번쯤 돌고 나자 강사가 이렇게 외쳤다.


"자, 배영!"


당황스러웠다. 강사에게 배영을 어떻게 하라는 말을 단 한 마디도 듣지 못했다. 만약에 내가 '배영'이라는 단어의 뜻을 몰랐다면, 그래서 '배영'을 다이빙 같은 걸로 착각했다면 수영장 밖으로 나갔을 거다.


다행히도 배영은 배가 수면을 향하게 하는 영법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배영에 도움이 될 만한 이론적인 지식도 조금은 있었다.


인간은 원래 물에 뜬다나 어쩐다나.


그런데 이 이론이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다. 배영을 처음으로 해야 하는 나의 기분은 마치, 영 믿지 못할 사람들과 신뢰게임을 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 같았다. 내 뒤에 몇 명이 날 받아주겠다면서 서 있고, 난 그 사람들을 향해 뒤로 넘어져야 한다.


신뢰 게임




자유형에서의 힌트


자유형을 연습하면서 '못 미더운 것'들과 화해하는 경험을 좀 겪기는 했다.


고개를 조금은 덜 들게 된 거, 킥판에 내 몸을 다 싣지 않게 된 거 같은 발전들은 '이렇게 해도 물에 뜨는구나' 하는 신뢰가 생기면서 가능해졌던 것들이었다.


자유형으로 숨을 쉬려면 고개를 돌렸을 때 적어도 입이 수면 밖으로 나와 있어야 한다. 그전에는 킥판의 부력으로 좀 띄웠지만 킥판을 쓰지 않으면서는 숨 쉴 때 고개를 다시 더 들게 되었다. 그래서 강사는 계속해서 "고개를 들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고개를 들어도 수면 밖으로 입이 잘 안 나오는데, 머리를 팔에 붙일 만큼 들지 않아야 한다는 게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지금 상태에서 고개를 들지 않고 숨을 쉬려면 인공 아가미 말고는 방법이 없을 것 같았다. (수영보단 로봇 물고기가 되는 편이 빠를 것 같다는 느낌..)


하지만 강사의 피드백을 받을 때마다 시도는 해 보았다. 실패가 대부분이었지만,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느낌이 올 때가 있다. 몸과 닿은 물의 흐름이 뭔가 다르게, 그리고 기분 좋게 느껴졌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머리는 숨 쉴 만큼 떠 있었다.


물과 내 몸을 믿어야 한다.



배영 신뢰 게임 시작!


나는 강사를 등지고 돌아서 물 위에 누울 준비를 했다. 자유형 할 때처럼, '절대 안 뜰 거 같은데 뜰 거야'라며 마음을 다잡았다. 머릿속에서는 물 안으로 풍덩 들어가 물을 잔뜩 먹는 모습이 플레이되었기에 나는 물을 먹을 각오를 해야 했다.


수영하기 전에는 물 먹는 거, 코에 물이 들어가는 거 이런 게 너무 무서웠는데... 수영하면서 물을 조금씩 먹었더니, 물 먹는 것도 별거 아니더라고.


호텔 수영장에서도 목욕탕에서도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물 위에 눕기. 긴장되었지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에라이!!


"풍덩!!" 할 것 같은 물은 고요했고, 내 몸은 고요한 물 위에 떴다.

진짜 신기했다. 또 한 번 물을 믿을 수 있게 된 경험


스스로 몸을 띄운 다음에서야 강사는 내 머리를 잡아 제대로 된 자세를 알려주었다. 천장에 있는 세로줄을 보며 따라가고, 다리를 좀 더 띄워 발차기하라.


가라앉지는 않았지만, 물이 코 옆에서 찰랑거리니 두려움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다. 그리고 역시나 발차기만으로는 너무너무너무 느렸고, 내가 향하는 방향이 보이지 않아 답답했다.


게다가 나와 반대 방향으로 가며 접영하는 사람들이 발차기를 하면, 큰 파도가 일어 얼굴에 물을 뿜었다. 제대로 맞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물을 먹었다. 나중에 J가 말하길, 물을 안 먹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보이는 입 모양을 했다고 한다. 이제 물 위에 뜨는 나는 믿는데, 주변에서 접영하는 사람들을 못 믿게 되었다.


옆에서 접영하는데, 나 혼자 배영하는 건 정말 가혹하다고...



#수영일기 #수영초보 #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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