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상담 일정이 하나 있었지만 진한 커피가 절실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1층으로 내려가 산미가 없는 진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 시켰다. 하늘은 진한 회색빛을 띄고 있었고 밖에서부터 나는 비 내음과 고소한 원두의 향이 함께 뒤섞여 들어왔다.
' 변호사님, 머리 자르셨죠? '
내가 에스프레소 기계 바로 옆에서 종류별로 진열되어 있는 원두들을 바라보고 있자 카페 사장님이 나에게 물어왔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 어려 보인다. '라고 칭찬을 해주었다. 머리를 자른 걸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다니, 내심 감동했다. 나는 테이블에 기대어 밖으로 내리는 비를 보면서 잠시 멍을 때렸다. 원래는 간소한 안부만 묻고 빠르게 커피를 받아들고 사무실로 올라가서 밀린 일들을 하면서 커피를 마시곤 하지만 오늘은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가 커피를 받아들고 잠시 서 있자, 사장님은 나에게 연휴 일정을 물으셨다. ' 사장님은 연휴에 뭐 하세요? ' 나는 되물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나는 사장님의 현재의 목표인 '사업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한참을 들으며 커피를 마셨다. 그러고 보니 핸드폰도 사무실에 놓고 내려왔다.
사장님은 ' 카페는 낭만이 있어야 한다. '고 했다. 마침 카페 안에는 낭만적인 음악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를 정체 없이 어디론가 데려가던 아침의 음악과는 달리 대단히 편안하고 현실적인 음악이었다. 아침 출근길에는 모차르트의 'elvira madigan' 피아노 콘체르토를 들으면서 걸었다. 유튜브에서 자동 재생되는 목록의 곡이었다. 나는 생각보다 많은 종류의 음악을 듣는다. 결국 클래식 음악으로 회귀하게 되지만 그래도 여러 종류의 음악을 듣곤 한다. 오늘 아침에는 다시 오래간만에 슈베르트의 피아노 곡을 들었다. 유튜브의 자동 재생 목록은 슈베르트를 거쳐 헨델, 베토벤, 모차르트로 이어졌고 그렇게 음악을 들으면서 걷다 보니 오래전 어딘가 여행지가 생각났었다.
그 기억은 너무 오래전 일이라 나라도, 도시도, 그때 보았던 사람들도 어디인지 정확하게 기억해 낼 수 없었고, 이미 반쯤은 흐릿해져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걷고 있는 나는 이미 반쯤은 아무런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 사멸되어 버린 미라의 잔재처럼 부스럭부스럭 걷고 있었다. 눈을 뜨면 바로 배가 고팠는데 냉장고에는 늘 그렇듯이 마땅히 먹을 것이 없었다.
어젯밤에는 늦게까지 경기도 이천에서 조사 입회가 있었다. 피의자가 군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군 사령부에서 진행된 4시간에 걸친 영상 녹화 조사였다. 방음이 매우 잘 될 듯한 두꺼운 출입문에 cctv 바로 앞에서 4시간 동안 앉아 있으려니 숨이 막혀왔다. 그것은 한정된 공간 안에 남아 있는 공기가 아주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것 같은 희미한 고통이었다. 신경을 쓰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을듯한.
그 답답함을 조금 해소하려는 듯이 조사를 받는 동안 에어컨에서는 추운 바람이 연신 나왔다. 오래간만에 두터운 카디건을 입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오는 길은 비가 쏟아져 내렸지만 바로 퇴근을 하지 않고 저녁 회식 장소로 이동했다. 그리고 오늘, 나는 어제 4시간 동안 열심히 적어둔 '자기변호 노트'를 가방에 넣고 우산을 펴고 길을 나섰다. 오늘 저녁에도 조정위원회 모임이 있다. 평소와 다름없이 바쁜 날들이다.
다시 정신을 차리니 카페 사장님은 자신의 '카페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눈을 반짝이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누군가와 동업을 해서 건물을 짓는다. 물론 건물을 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고 명도 소송 등 복잡한 과정도 있었다. 어쨌든 그의 현재 꿈은 대형 카페를 만들어 낮에는 커피와 베이커리류를 저녁에는 알코올과 적당히 먹을 것을 파는 것이다. 물론 최근에 지어지고 있는 많은 종류의 대형 카페와 어떻게 차별점을 둘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함께 한다. 그가 원하는 카페는 우선 24시간, 365일 영업을 하는 것이다.
카페는 플레이스가 중요하다. 커피를 만들어주는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이미 만족을 얻는다. 그는 말했다. 커피는 마시기 전부터 만드는 과정을 보면서 이미 '맛있겠다.'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고, 나도 커피를 즐겨 마신다. 생각해 보면 하루도 빠짐없이 커피를 마시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오랫동안 커피를 기호식품처럼 마시면서도 나는 커피의 맛을 잘 몰랐다. 어쩌면 관심 있게 맛을 음미하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경우, 카페는 맛있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찾아가는 곳이 아니다. 그 공간을 즐기려고 가는 쪽에 가깝다. 카페에 가서 시간의 흐름을 느끼면서 그대로 앉아 있거나 친구와 대화를 하거나 노트북을 들고 일을 하러 간다. 그곳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는지, 시야가 탁 트여있는지, 노트북을 충전할 만한 콘센트가 있는지가 중요하다. 나에게는 말 그대로 커피의 맛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 기억에 남지도 않는다. 나에게 카페는 그렇게 필요에 의해 잠시 머물렀다가 그곳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곳이다.
지금 정도는 이미 애정 할만한 카페나 bar 같은 곳이 있을 법도 한데 나에게 그런 곳은 아직 없다. 나에게 각별한 플레이스란 봄 사무실 정도가 전부가 아닐까? 나는 봄 사무실을 만들면서 처음부터 모든 소품을 하나하나 직접 골랐다. 개업을 하기 전부터 매일같이 사무실에 와서 일이 없어도 앉아 있다가 가기도 했다. 카페 사장님의 '카페 사업'이야기는 재밌었다. 이야기에 녹아있는 열정과 꿈과 목표가 느껴졌고, 앞으로 힘차게 나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꿈을 구체화하고 그것을 실현시킬 만큼의 의지가 충분해 보였다. 단지 이야기를 듣기만 했어도 그것으로도 충분하다고 느껴졌다.
다시 사무실로 올라와 오늘 하루의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생각을 했다. 이미 커피는 절반 넘게 마셨고 오전 시간도 한 움큼 지나가버렸다. 나는 점심시간 어제 입회를 한 자기변호 노트의 쟁점을 따로 적고, 열심히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오늘은 점심시간이 지난 후 봄 사무실 맞은편에 있는 남양주 지청으로 가서 외부직근로자의 면접위원으로 면접을 심사하고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나서는 또 상담과 해야 할 전화들이 쌓여 있었다.
한편 비는 그치지 않고 내리고 있다. 날은 덥지도 춥지도 않은 딱 적당한 날씨이다.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잠시 바라보고 있으려니, 나는 나의 진정한 본질을 어딘가 곧 가려고 마음먹은 바간(bagan) 같은 곳 숨겨두고 일을 위해 필요한 에너지만 따로 만들어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지금의 나도 추석을 앞둔 9월의 날씨와 같이 어중간하게 안정된 상태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곳은 달의 표면과도 같이 공기가 없는 선상이다. 그렇다. 이곳은 공기가 없다. 고요하고 아무것도 없으며 어중간하게 결정되지 않은 곳이다. 언제까지나 이곳에 있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본질을 숨기에는 최적화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