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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시효가 완성되어도 판사님이 판단을 안 하는 이유

재판에서의 변론주의, 석명권에 대하여.

by 정현주 변호사


일반적으로 돈을 빌려주고 돌려받기로 한 날짜가 이미 10년이 지나버리면 소멸시효가 완성이 된다. 소멸시효란 시효로 인하여 권리가 소멸한다는 뜻으로, 일반 채권의 경우 10년(민법 제162조 제1항), 상행위로 생긴 채권의 경우 5년(상법 제64조)을 정하고 있다. 소멸시효는 권리 불행사의 상태가 일정하게 계속되면 그 권리를 소멸하게 한다는 취지이므로, 소멸시효를 멈추게 하려면 당연히 소멸시효가 지나기 전에 압류 등 절차를 진행하거나 소송을 제기하여 청구를 해야 한다(민법 제170조).




A 씨는 오래전 잠시 자산 상황이 좋지 않아 아는 지인으로부터 1000만 원을 빌렸다. 상황이 더 좋아지지 않다 보니 변제를 약속한 시기는 그로부터 10년은 훨씬 더 지난 것 같고 그때까지 채권자로부터 소장 등 아무것도 받은 것도 없다. 재산이 없어 별도의 압류가 걸린 것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예전의 채권자가 아닌 추심업체로부터 지급명령신청(소장)을 받았다. 대충 내용을 읽어보니 예전에 돈을 빌린 채권자가 자신이 채권을 받지 못할 상황이 되자 추심업체에게 채권을 양도했던 모양이고, 추심업자는 A 씨가 예전에 작성했던 차용증 등을 근거로 소장을 보내온 것이다.



A 씨는 채권자에게 바로 연락을 취해봤지만 채권자는 당연히 아무런 연락을 받지 않았다. 변호사를 선임하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선임 비용이 만만치 않다. 빌린 돈의 절반에 가까운 선임료를 내면서 변호사를 선임하기는 부담이 된다.


' 그거 10년도 더 전에 빌린 거면 이미 소멸시효 완성된 거 아니야? 갚을 필요가 없다고. '


누군가가 고민하고 있는 A 씨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소멸시효라고? 다행이다!' A 씨는 이처럼 우연히 소멸시효란 고마운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막막한 상황을 해결할 만한 빛을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장 변호사 비용도 만만치 않고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고민만 하던 차였는데 ' 소멸시효가 완성된 채권이니 이건 아무런 효력이 없다. 나에게 더 이상 청구할 수 없다.'라는 말을 들으니 재판에 직접 나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데 변론 기일 당일 A 씨는 생각보다 긴장이 되었다. 특히 판사가 A 씨에게 ' 원고가 증거로 제출한 차용증을 피고가 직접 쓰신 것 맞나요? '라고 물었을 때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인정했을 뿐이다. 판사는 피고가 인정한 내용을 조서에 기재한다고 했다. 하지만 괜찮다. 이건 소멸시효가 완성된 채권이니까. 똑똑한 판사님이니까 당연히 그 정도는 알고 있지 않을까? 나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겠지.


그런데 웬일인가? 딱 한 번의 변론이 있고 약 한 달 후 A 씨는 원고의 청구를 모두 인정한다는 내용의 판결문을 받게 되었다. 심지어 이자까지 인정이 되어 A 씨가 갚아야 할 돈은 일 억 원에 가깝게 불려나 있었다. 왜 판사가 내 친구도 알고 있는 소멸시효를 까먹고 판단을 하지 않은 것인가? A 씨는 억울한 마음에 법률사무소 봄의 정현주 변호사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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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하우스3.PNG mbn 주간하우스 패널로 출연 중이 정현주 변호사


위와 같은 일은 우리 주위에서 생각보다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나는 남양주에서 법률사무소 봄을 열고 많은 의뢰인을 만나 상담하면서 '왜 판사님은 당연히 고려해야 할 일들을 고려하지 않는 걸까요? '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고 직접 소송을 나서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당사자소송*이라고 부르는데, 당사자소송이 위험한 이유가 바로 이런 데에 있다.


우선 A 씨에게는 방법이 하나 있다. 일단은 판결이 확정되기 전에 항소를 하는 것이다. 항소를 한 후, 당연히 주장했어야 할 '소멸시효의 완성' 주장을 직접 또는 변호사를 통해 하면 법원은 당연히 피고의 항변을 고려한 판단을 한다.


그렇다면 1심 판사님은 정말 소멸시효가 완성된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법원의 재판은 기본적으로 '변론주의'를 원칙으로 한다. 변론주의란 소송자료, 즉 사실과 증거의 수집과 제출의 책임을 당사자에게 맡기고 법원은 당사자가 제출한 소송자료만을 재판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는 원칙이다. 따라서 법원은 변론주의에 따라 당사자가 주장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는 판단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다.


물론 불분명한 사실에 관해서는 법원의 판사가 '석명권'을 행사하여 명확하게 밝히게 할 수 있지만 그것도 변론 주위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허용이 될 뿐이다.


즉 소송관계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당사자에게 사실상 또는 법률상 사항에 관해 질문할 수 있도록 촉구하는 소극적 석명은 허용되나, 새로운 신청이나 주장을 하도록 시사하거나 구체적인 증명방법까지 제시하여 증거신청을 종용하는 적극적 석명은 허용되지 않는다. 판례는 이와 관련하여 " 당사자가 주장하지도 않은 법률효과에 관한 요건사실이나 독립된 공격방어방법을 시사하여 그 제출을 권유하는 것은 변론주의에 위배되고 석명권 행사의 한계를 일탈한다(대법원 2001. 6. 29. 2001다21441,21458 판결 등). "라고 판시하고 있다.


왜 그럴까? 기본적으로 법원의 판사는 누군가의 편을 들어서는 안 된다. 재판은 실질적으로 양 당사자의 주장과 증거로 인해 판가름이 나는 것이고 법원은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제3자의 입장에 머물러야 하기 때문이다. 소멸시효 완성 사실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석명할 의무가 있는지와 관련하여 판례는 '사실심이 소멸시효 완성에 관해 석명해야 할 의무는 없다(66다 1304). '라고 판시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A 씨는 직접 서면을 제출하거나 또는 변론에 참석하여 구두(말)로라도 판사님께 소멸시효의 완성 주장을 했어야 했다. 판사 입장에서는 답답한 상황이지만, A 씨가 주장하지 않은 부분까지 판단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부분이 있기 때문에 법원의 소장을 받으면 우선은 변호사와의 상담을 받아보는 것이 안전하다. 늘 말하지만 변호사의 선임 여부는 그다음에 결정해도 늦지 않는다!


법률사무소 봄 유튜브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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