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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가 사법시험을 준비한다고?(1)

2006, 티벳으로 가는 히말라야에서.

by 정현주 변호사


오랫동안 해외를 오가며 여행을 하던 나는 27살이 넘어 다시 한국에 들어왔다.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사법시험'을 준비하겠다고 하였다. 나의 이런 당돌한 말에, 몇몇 친구들 뿐만 아니라 주변의 어른들까지도 날 걱정어린 눈으로 보았다.


너가 사법시험을 준비한다고?


나 또한 훗날 알게되었지만, 사법시험에 합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릴때부터 공부를 아주 잘했다. 그들 중에는 어릴때부터 '수재'소리를 들으면서 자랐거나, 최소한 지역구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거나, 항상 모범생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나의 20대의 시절은 '공부를 잘 하는 모범생'의 모습과는 아주 많이 달랐다. 비록 법학과를 선택해서 들어가긴 했지만, 나는 1학년에 들어가자마자 공부는 커녕 학교를 거의 나가지 않아 '학사경고'를 받았고, 그렇게 1학년 1학기를 다니고 나서는 아예 휴학을 하고 돈을 모아 친구들과 인도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계기가 되어 20대의 대부분을 해외에서, 특히 적은 돈으로 장기 체류가 가능한 네팔이나 방콕같은 아시아대륙에서 시간들을 보냈다. 종종 한국에 들어오긴 했지만 한국에 들어오는 목적은 알바를 하면서 돈을 모으기 위한 목적이었다. 당시에는 대학생 신분이지만 학원에서 강사알바를 하는것이 가장 빠르게 돈을 모으는 방법이라 평일에는 동네 학원에서 강사알바를 했고, 주말에는 할리스 등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여행을 다니다보면, 늘 경비가 빠듯했다.




2006. 12. 티벳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나는 *지나와 네팔 카트만두에 있었는데, 우연히 현지에서 하는 여행사를 발견하게 들어가게 되었다. 그 이유는 그 여행사 앞에 '티벳 50불(숙식 포함)'이란 글귀가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네팔에서 바로 인도 다람살라로 내려갈 생각이었지만, 티벳을 다녀오는데 이 가격이라고? 믿을 수 없는 놀라운 가격에 아무 생각 없이 투어 신청을 하고 말았다.


Scan_20220214_222951.png 2006. 네팔 카트만두



지도상으로는 네팔과 티벳은 무척 가까워보인다. 하지만 사실 네팔에서 티벳으로 가려면 그 사이에 큰 히말라야 산맥이 있고, 차로 네팔에서 티벳 라사로 들어가려면 무조건 히말라야 산맥을 거쳐 가는 방법 밖에는 없다. 티벳인이 운전하는 6인용 승합차를 올라타고 하루에 대부분을 해발고도 약 6000m까지 계속 넘어가는 고된 여정을 해야했다. 무엇보다 일정표를 보자니 카트만두에서 출발하는 차는 오전 내내 6일을 달려서야 티벳 라사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내가 신청한 '티벳 50불'에는 숙식(정확하게 말하면 조식)이 포함되어 있고, 라사에 데려다주기는 하나, 돌아오는 길은 각자 알아서 해야 했다.



나는 등산을 무척 싫어하기에, 50불만 내면 히말라야 산맥도 바로 앞에서 볼 수 있고, 티벳으로 들어갈 수 있다니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티벳에서 다시 네팔로 들어오는 일쯤이야 그 때는 별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티벳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선 '외국인입국허가서'가 필요하다고 했다. 쉽게 말하면 '비자'다. 당시 티벳은 중국의 자치구가 된 상태였지만, 특별자치구로서 중국 비자로도 들어갈 수 없었다. 이런 까닭에 나는 여행사에 외국인입국허가서를 신청하고 네팔 카트만두에서 3주를 기다렸다.


12월 중순이 되어서야 당시 영국 할아버지와 폴란드 국적 할머니의 부부, 나와 지나가 한 팀이 되어 외국인입국허가서를 발급받았다. 이처럼 당시 티벳으로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외국인입국허가서'는 반드시 외국에서 한 팀(무조건 티벳인 가이드가 한 명 포함)을 기준으로 여러 명이 함께 신청해야 하며, 30일 이내 체류를 하고, 함께 움직이는 것을 조건으로 했다(막상 들어가면 안지켜짐).


나의 첫번째 어려움은 네팔 국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네팔 국경에서 중국 위안화를 환전하려고 하니, 네팔인들이 내가 내민 소액 달러들을 너무 작아서 환전해주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었다(외국 환전에서는 100달러 한장을 제일 좋아하고, 10달러씩 여러장을 준다거나 하면 가치가 떨어진다고 보았다). 어린 동양여자애들이 환전부터 차별을 당하니, 같은 팀이었던 영국 할아버지가 '이럴거면 나도 다른데서 환전한다!' 라고 소리를 버럭 질러주셔서, 얼떨결에 함께 환전받게 되었다(당시 영국할아버지께서는 가장 등급이 높았던 '파운드'를 상당히 많이 환전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Scan_20220214_221803_001.png 히말라야 산맥 곳곳에 있던 에매랄드빛 호수
Scan_20220214_222829.png 승합차에서 내려 본 히말라야 산맥, 만년설이 쌓여있다.


두번째 어려움은 강추위였다. 우리는 당시 따뜻한 인도에서 올라왔고, 네팔에 있다가 다시 인도로 내려갈 생각이라 두꺼운 옷들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12월의 히말라야는 너무나도 추웠다.


히말라야 곳곳에는 소수티벳인들이 고산지대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 팀은 6인용 승합차를 타고 종일 히말라야를 넘어 달리다가 밤이 되면 소수티벳인들이 운영하는 여관에서 저녁을 먹고 머물렀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투어에서 제공하는 조식을 먹고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여관들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추워서 담요를 5개씩 덮고도 밤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여관 방은 난방이 되지 않는 방에 흙벽에 단지 바깥의 살인적인 바람을 막아 주는 용도에 가까웠다. 밤새 조금도 쉬지 않고 거센 바람으로 창문이 덜커덕 거리면서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다.

Scan_20220214_223347.png 내가 묵었던 여관
KakaoTalk_20220125_123236332_01.jpg 히말라야 고산지대 티벳인들.

여관 방 한가운데는 아주 큰 텀블러에 뜨거운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너무 추우면 한 잔씩 마시면서 몸을 녹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추운 나머지 물을 마시기 위해 담요에서 몸을 빼기도 어려웠다.


특히 밤에 소변이 마려우면 울고 싶었다.. 추워서 뜨거운 물을 마시며 몸을 녹이고 싶은데, 물을 계속 마시다 보면 화장실에 가고 싶은 것이다!


세번째 어려움은 상상을 추월하는 허기짐이었다. 애초에 티벳을 가기로 한 것 자체가 무리한 여정이었고, 인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티벳에서 필요 최소한의 돈만을 환전할 수밖에 없었다. 돈이 없다보니 자연스럽게 저녁은 굶었다. 근데 생각보다 너무나도 배가 고팠다.


이쯤되면 내가 왜 내 돈을 내면서 이렇게 고생을 사서 하고 있나, 살면서 이렇게까지 일차원적인 이유로 힘들수도 있을까 ㅡ 그런 생각이 들었다.


Scan_20220214_222626.png 2006. 티벳 여관에서.
Scan_20220214_221334_002.png 2006. 티벳 거리에서.


*지나 - 나의 20대 시절의 여행을 대부분(?)함께 해준 고마운 고등학교 친구다. 지금은 일본에 살고 있다.

*사진들은 2006년경 직접 찍은 것으로 당시 여행에서 돌아온 후 인화한 것을 스캔한 것입니다.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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