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에 느끼는 이 절망은 내가 머무는 곳의 색채를 남김없이 앗아가 버리고 말았다. 나는 인식하지 못한 지점에서 잠이 들어 머나먼 지평선이 보이는 바다 위에서 깨어난다. 이망망대해(茫茫大海)는 어딘가 흘러간 꿈의 한 조각인 것 같다.
맨 발의 나는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면서 어디론가 정처 없이 걷기 시작한다. 이 낯선 풍경은 홀로그램(hologram)의 영상처럼 이질적이고 낯설다. 불안한 마음이 깃든 나에게 하늘의 별은 무심한 듯 다가온다.
' 어디로 가고 있지? '
' 나도 잘 모르겠어. '
' 왜 마음에 절망이 가득한지 나에게 알려주겠어? '
나는 모르겠다고 답한다. 정말로 모르겠어. 아니면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마땅한 언어가 내 안에 자리하지 않는다는 편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바람이 불어온다. 조금도 시원하지 않는 봄날의 따뜻한 바람이.
이 낯선 곳에서,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너에게 이야기를 해 보기로 한다.
' 나는 사실, 오래도록 방황을 했어. 그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지? '
' 그래. '
' 세계가 너무 넓어졌어. 불필요한 것들을 너무 많이 알게 되었어. 내가 갈 수 없는 곳이라면 차라리 모르는 편이 안전할지도 모르는데. 문제는 세계가 너무 넓어져 버린 거야. 그리고 나는 지금으로서는 그것들을 다 담을 수가 없어. '
' 너는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
' 어쩌면, '
' 그럼 모르는 세계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가능하다면 말이야. '
' 지금은 그렇기도 해. '
지금은 그렇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물에 빠져버린 뒤에 물에 빠지기 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가능할 리가 있나? 그러자 너는 나의 생각을 이미 읽은 듯이 내 머릿속으로 말한다.
' 가능하기도 하지. 만약에 기억을 봉인(封印) 할 수 있다면 말이야. 그리고 너는 이미 해 본 적이 있지,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묻어두는 것 말이야. '
' 마치 무엇인가를 죽인 다음, 그것을 흙으로 덮는 것과 같이? '
' 그래. 그와 비슷하지. 조금 더 세심한 작업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말이야. 시간이 조금 걸리지만 그래도 적당한 때가 올 거야. 그 시기가 오면 봉인을 하면 돼. 예전의 기억을 떠올려서. '
너는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라고 말한다. 그때, 나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고 있었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를 만나기 전 절망에 빠져 스스로를 구더기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죽음을 생각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번만은 너에게 감사한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가련한 너에게 감사하겠다.
너는 나의 감각을 송두리째 파괴하려던, 그 절망에서 나를 구해 주었다.
감히 내가 너와 닮았다고 주제넘게 생각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너를 끌어낼 힘은 내게 있었지만, 너를 붙잡아 둘 힘이 내게는 없었던 것이다.
그 행복한 순간에 나는 자신을 너무나 작게 또한 위대하게 느꼈다.
그러나 너는 가혹하게도 나를 이런 불안한 인간의 운명 속으로 다시 몰아넣었다.
우리의 정신이 획득한 가장 훌륭한 덕성일지라도, 언제나 이질적인 요소가 따르게 마련이다.
우리가 이 세상의 부귀영화에 도달하면, 더욱 높은 영적(靈的)인 것을 허망이고 망상이라고 부른다.
우리에게 생명을 부여한 아름다운 감정도 속세의 붐비는 혼란 속에서는 굳어 버린다.
그는 죽음을 생각했다. 스스로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많은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다. 그때의 나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 오래전의 기억이지, 벌써? '
너는 내 마음을 읽은 듯이 다시 말을 건다. 그때 우주의 일부인 하늘은 별들로 가득 빛나고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어디선가 밀려들어온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주위가 컴컴한 어둠으로 덮여버렸음을 알았다.
' 그리고 그때와 비교해서 너는 얼마나 성장한 것 같아? '
너는 끈질기게 물었다.
너의 질문에 나는 눈을 감고 그때를 떠올렸다. 사람은 얼마나 변할 수 있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시간은 그냥 정방향으로 흐르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은 사람을 변하게도 하지만 그저 그 자리에 굳게 만들기도 하였다. 너는 다시 말해 '내가 얼마나 굳어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 나는.. 정확히 그때와 비슷한 정도의 절망을 느끼고 있어. '
나는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나는 많이 달라졌지. 나의 시계는 앞으로 향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지금으로서는 이 절망을 설명할 만한 마땅한 언어가 떠오르지 않지만, 나는 결국 메피스토와 계약을 맺어서라도 다른 것들을 향해 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하지만 지금은 그저 고통만을 느끼고 있지. 방향을 잃은 채 말이야.
' 하지만, 너는 방향을 설정해 주는 사람이 아니야? '
' 아니야. 방향을 설정해 주고 있지 않아. 다만 나는 듣고 있을 뿐이야. 그리고 방향은 언제나 그들 스스로가 선택해. '
그렇다면,
너도 그들과 같이 듣는 자가 필요한 거야. 너의 방향을 선택하기 위한.
그래, 그럴지도 몰라.
나는 갑자기 불현듯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누워서 나의 손을 하늘로 들어 살펴보았다. 내가 그것들이 실존하는 것이 맞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또 내가 그곳에 누워있는지를. 나는 그 형상(形像)을 분별하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