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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주 변호사 May 06. 2024

녹색(의 나는)은 어떤이유도 없이 그 자체로 존재했다.

그냥 말 그대로 '녹색'


아침에 눈을 뜨니 비가 내리고 있다. 하늘은 어둡고 세계가 온통 회색빛으로 가득한 느낌이 들어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휴일이지만 마침 갑자기 들어온 상담도 취소되어 다행이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사실상 잠을 자는 것인지 아니면 다시 겨울잠을 자야 하는 들짐승처럼 동면을 하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야생적인 잠이다. 


그리고 나는 물론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의 나는 '녹색'이었다. 녹색의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냥 말 그대로 '녹색'이라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ㅡ 태양이 쏟아지는 나무의 잎 색이라고 할까, 푸릇푸릇 한 잎사귀에 뜨거운 태양으로 인한 옅은 느낌이 조금 섞인듯한 그런 녹색이다. 그 세계에서 녹색은 어디에서나 존재했다. 사실상 색의 구별이 없는 곳이었지만. 


녹색(의 나는)은 어떤 이유도 없이 그 자체로 존재했다. 그 존재에는 기쁨과 슬픔, 고통과 환희와 같은 인간적인 감정 외에 여러 가지 소리가 있었다. 이를테면 바닷물이 밀려드는 소리, 부스럭 부스럭거리는 발걸음 소리,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는 대화의 소리, 그리고 각각의 소리에는 내음도 있었다. 쏟아지는 비의 비릿한 내음, 새벽이 다가오는 것을 알려주는 청명한 내음, 그리고 저 멀리서 은은하게 오는 향의 내음. 


어딘가 저 멀리서 아지랑이 같은 향이 보였다. 

역시 그곳은, 특수한 세계였다. 


녹색(의 나는)은 움직임이 없었다. 그 자체로 그 세계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하지만 아직 딱딱하게 굳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만은 절대로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하늘색의 꾸물꾸물한 하늘이 내 주변을 덮쳐왔다. 푸릇푸릇 한 태양의 기세를 삼켜버리고 녹색을 뒤덮겠다는 듯이, 


언제 다시 눈을 떴는지 모르겠다. 하루가 기가 막히게 지나간다.

지금은 다시 새벽, 비의 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종일 비가 내리는 잔뜩 흐린 날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날이다. 새벽에 내리는 이 부슬부슬 한 느낌은 어딘가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곳은 오래전의 선들과 연결되어 있다. 


다시 눈을 감는다. 그리고 특수한 세계로 침잠(沈潛)하는 것이다. 

녹색의 나와, 또 흐릿한 회색(grey)의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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