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없는 것 같다.
어린 시절의 상처는 이미 치명적이다. 내가 인식하고 있는 부분뿐만 아니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까지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20대를 지나고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오면서 어느 정도 잊어버리고 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30대가 오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서 나는 결국 나의 상처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마주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느끼게 된다.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배우자의 별 뜻 없는 말 한마디를 듣거나, 떼쓰는 내 아이를 보면서 불현듯 느끼는 사소하고 괴로운 감정들이 갑자기 견딜 수 없게 다가오는 것이다.
나는 지난 몇 년간, 어린 시절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에 대한 여러 가지 책들을 읽어보거나 글을 쓰기도 하면서, 그 과정에서 나를 바로 보려고 노력했다.
이런 과정에 집중하게 된 이유는 내가 무엇보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내 아이에게 내가 받은 상처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자가 제대로 된 사랑을 주기란 당연히 어렵다).
수많은 서적에서 말하고 있는 해답은 비교적 간명했다.
어린 시절 우리에게 무심했던 부모들 또한 불행하게 자란 것이므로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그들을 용서하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런 책을 쓰고 있는 사람들은 나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준 타인을 정말로 용서해본 적이 있는가?
우리가 받은 어린 시절의 상처는 사실 사소하고 별 것 없는 것들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타인에게 설명하기 쉽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나에 대한 직접적인 폭력이나 욕설이 난무한 집에서 자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어느 정도의 경제적 지원도 해주었다. 비록 그것이 큰 지원이라고 할 수는 없었을지라도, 그 시절 부모님 나름대로의 최선이었다.
하지만 중, 고등학교를 통틀어 하교 후 집에 돌아올 때마다 엄마는 늘 나에게 하소연을 했다.
거의 하루도 끊어지는 일이 없이 주로 돈이 없다는 이야기들을, 여러 가지 힘든 이야기들을 나에게 했다. 그리고 어린 나를 앞에 두고 온갖 욕설이 오가며 싸움을 계속했다.
나는 꽤 어렸을 때부터 '결혼은 불행한 일'이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 시절의 나는 굉장히 외로웠다.
초, 중, 고를 지나는 동안,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나의 학교생활은 어떤지 부모님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부모님에게 자유롭게 하지 못했고, 오히려 엄마의 하소연을 들어줘야 했다.
내 어린 시절이 피폐했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불행한 일은 따로 있었다.
10대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또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는 더더욱 집을 벗어나야만 할 공간, 피곤한 공간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위로 받고 쉬어야 할 공간에서 나는 쉬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를 낳고 난 후, 사람들이 부모님에게 느끼는 당연한 평온함, 안정 같은 것들이 나에겐 불편감만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의 부모님에게 분노감을 느낀 것도 어느 정도는 당연했다.
이제는 사람이 제대로 성장하기 위한 과정에서,
아이에게는 누군가의(부모라면 가장 좋겠지만) 무조건적인 사랑과
어느 정도의 헌신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을 안다.
아이는 조건 없는 사랑을 받아야 제대로 성장할 수 있고,
이런 사랑을 바탕으로 한 강한 자기 긍정이 삶의 자양분이 된다.
살아가면서 가장 힘든 순간에도 내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어줄 따듯한 난로와 같은 존재가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그렇다면,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다.
인간이란 이토록 나약하고,
사랑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사랑이 없이 자란 사람이 아이를 낳았을 때 어떻게 사랑을 돌려줄 수 있을 것인가.
어려운 일이다.
내가 내 아이를 사랑하면 할수록, 나는 보고 싶지 않은 과거의 나를 대면할 수 밖에 없다.
본능적으로 '상처받은 나'로부터 도망치고 싶기 때문에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내 아이에게 좋은 부모가 되고 싶기 때문에,
이제는 과거를 마주 보고 나아가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결국, 어린 시절의 상처는 내가 감당하고 함께 가야할 짐 같은 것으로 인식된다.
이 것은 과거의 부모로부터 사과를 받는다고 나아지지도 않고(부모님은 기억조차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현재의 부모를 진정한 의미에서 용서할 수도 없을 것이므로,
끊임없이 현재의 나를 보고, 내 아이에게 사랑을 주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사랑을 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어느 정도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 과정에서 나는 분명 성장하고 있고,
또 나아가고 있는 것이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의 나의 삶이며,
내가 내 아이에게 내가 받았던 것들보다 더 나은 것을 줄 수 있다는 믿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