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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주 변호사 Aug 16. 2024

그림자 분리작업


내가 사는 아파트는 녹음이 우거진다. 아침부터 세차게 매미들이 울부짖고 키가 큰 나무들은 호주의 어느 작은 마을을 연상케하듯 하늘을 모두 가린다. 요즘처럼 무척이나 더운 여름, 그 장렬한 끝을 기대하듯 땅속에서부터 후끈하게 올라오는 이 더운 열기, 눈을 감으면 다른 곳에 있는 듯이 어디선가 느껴지는 이 달짝지근한 내음.  


새벽에 일어났지만 본격적으로 일을 하기 전에 잠시 창문 밖으로 보이는 이 길들을 누비듯이 걷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인다. 나는 구름에 달 가듯이 집 밖에 나서기 위해 아주 가벼운 레이온 소재의 원피스를 걸쳐 입고(긴팔이지만, 지금 시간이 새벽 5시니 괜찮지 않을까 잠깐 생각해 본다), 아무것도 들지 않고 길을 나선다. 손에는 오로지 카드 키뿐이다.  


본능적으로, 나는 이 불타오르는 여름이 끝나가고 있음을 느낀다. 이곳에 살고 있는 이 많은 곤충들 또한 그 사실을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들은 한때를 열심히 살다가 짧은 생을 소멸하며 죽음을 맞이한다. 뜨겁게 장렬하는 빛 뒤의 길게 늘어진 그림자처럼 무쳑이나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열기가 시작하려고 하는 하늘, 이미 메마르게 죽어버린 곤충들과 벌레들의 사체가 여기저기 보인다.  


소멸하는 것들의 말로가 늘 그러하듯이,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곳에는 끝없는 침묵만이 감돌고 있다. 


나는 몇 달 전부터 그림자를 분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분리 작업은 꽤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나약한 마음들을 본체에 주워 담고, 실체적인 모습들은 남김없이 제거한다. 나의 그림자는 나를 닮았지만 내가 남겨놓은 몇 가지의 작업만 충실하게 수행한다. 사실상 그렇게 하기 위해 ' 그림자 분리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니까. 필연적인 일이겠지만, 마음이 좋다고 볼 수는 없다. 필요에 의한 작업에 가까우니까 말이다. 


' 그렇다면 실체를 넣은 본체는 어디에 있게 되는 거야? ' 


너는 묻는다. 


' 글쎄 ㅡ '


생각해 보지 않았다. 실제로는 '본체'를 어디에 두든 상관없다는 생각도 하고 있다. 그것이 중요할까, 본체가 어디에 있는지. 


' 그렇다면 그림자 분리 작업은 왜 하는 것인데? ' 


너는 여전히,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묻는다.  무척이나 건조한 목소리라고 나는 새삼스럽게 생각한다. 


' 너도 알고 있겠지만... ' 


나는 운을 띄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조금은 망설이는 마음이 생긴다. 이 과정을 너에게 설명하는 것이 좋을까? 설명하지 않더라도 어떤 이는 그 상황을 이해할 것이고 또 어떤 이들은 영원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이야기들은 굳이 빛을 볼 필요가 없다. 고대의 어둠과도 같은 깊은 그릇에 담겨 영원히 나오지 못할 것이다.  


' 너도 알고 있겠지만 사람의 나약한 마음은 타인의 이해나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야. 오히려 그 마음이 빛나는 곳에 있을수록 사람들은 그 나약한 마음을 비집고 들어와 이용하고 짓밟으려 들지. 어쩌면 그렇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할지라도 결과적으로는 그래. 그렇다고 우리가 늘 날카롭고 어려운 곳에 위치해야 할까? '


' 그렇지는 않지. '


' 그래, 그래서 때때로 그림자 분리 작업이 필요한 거야. 불필요한 곳에서 굳이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 


' 불필요한 곳에서 굳이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 


너는 갸웃거리며 내 말을 되뇌인다. 무슨 말인지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다는 듯이.


' 우선, 그림자 분리 작업이 끝나면 이곳에는 내가 없어. 당연히 불필요한 곳에서는 굳이 마음을, 실체를 드러내지 않아. 그들이 생각하는 나는 실제의 내가 아니니까 말이야. 그들이 보는 것은 오로지 '나의 그림자'일 뿐인 거지. 마치 유령과도 같은 거야. 나였지만 내가 아닌. '


' 마치 살아서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유령처럼. '


' 그래. 맞아. ' 


일단 지금의 이 계절은 나에게는 너무나도 덥다. 나는 오히려 조금은 추운 듯한 곳에 있는 것이 더 맞다고 느껴진다. 오래전이었다면 좋은 곳을 찾아 다른 곳으로 훌쩍 떠났겠지만, 지금은 그러기에는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방법은 하나, '그림자 분리 작업' 뿐이다. 실체적인 마음을 담고 나머지는 남김없이 제거한다. 다소 시간이 좀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가장 효율적이고 최선의 방법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림자 분리 작업을 마치고, 마음속에서 나는 완전히 지워진다. 실체가 있는 본체는 물론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적어도 '현 세계'에서는 중요한 일은 아니게 될 것이다. 또한 그 길로 되돌아오는 퇴로는 이미 차단이 된지 오래이다. 


글쎄, 나 또한 곧 알게 될 것이다. 이 계절이 끝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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