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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주 변호사 Sep 11. 2024

드디어 심연((深淵)을 마주 보았다.

기다렸어. 너가 나를 바라봐 주기를


어느 깊은 밤의 일이다. 나는 오랜 기간의 방황을 멈추고 드디어 심연((深淵)을 마주 보았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그 녀석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뱀처럼 나를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뿐이었지만 어쩌면 조금은 웃는 듯한 느낌도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뱀과 같은 녀석은 내가 똑바로 바라본 뒤로, 더 이상 나를 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녀석은 오래전부터 늘 옆을 맴돌던 나의 그림자와 같이 친숙하기도 했다. 나는 무엇이 그렇게 너가 어렵고 힘들었던 것일까?  녀석은 존재의 어두운 면을 담당하는 것이 지겹다는 듯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 기다렸어. 너가 나를 바라봐 주기를. ' 


너는 말했다. 


' 정말 오랜 기다림이었어. 어느 정도는 지칠 정도로 말이야. ' 


나는 결심한 듯, 너를 똑바로 바라본다. 너의 꾸물꾸물한 얼굴을 바라보고 날렵하게 빠진 꼬리를 바라본다. 어둠에 익숙해진 나의 눈은 신기하게도 너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암흑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침묵에 익숙해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메마른 침을 삼키고 너와 긴 대화를 시작해 보기로 마음먹는다. 


' 왜 기다렸어? ' 


나는 말했다. 


' 나는 나를 보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야. 우리는 태어남.이라는 것을 선택할 수 없잖아? 나도 나를 바라보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오랜 기간을 도망쳤지. ' 


너는 나의 말을 들으며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흰자위가 없는 검은 눈은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빛이 난다. 


' 하지만 나는 드디어 나를 찾았어. 이제는 나를 알겠어. ' 


나는 너에게 말한다. 


' 내가 나를 알게 되면서 비로소 알게 된 것들이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 스스로를 알지 못해.  그러다 보니 많은 것들을 잘못 판단하고 말지. '


' 이를테면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또는 과신하게 되거나 ㅡ, 그런 것들을 말하는 거지?' 


너는 나의 마음을 읽은 듯이, 내가 생각하려고 하는 문장을 떠올려 말했다. 


' 맞아. ' 


내가 있는 심연(深淵)으로 들어오렴. 너는 분명히 말했다. 

이곳이 너가 존재해야 할 실체가 있는 곳이야. 이곳으로 들어오렴.  

나를 알아야 비로소 나 자신을 지킬 수 있어. 


우리는 언젠가 이곳에 함께 한 적이 있었지. 너는 이제 나를 바라보았고, 너를 완전히 찾게 되었어. 어쩌면 그 과정에 이르는 길일 수도 있겠지. 그때처럼 아무도 알 수 없을 거야. 우리는 영원히 함께 하는 거야. 


' 그림자를 남기고, ' 


나는 말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어둠은 분명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다고. 그리고 흉측한 너(나)의 모습 또한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고. 지금은 없는, 사라져버린 그 망각의 바다 어디엔가 나는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기억을 남겨두었다. 그 별의 바다에서 나는 오롯이 혼자가 되었다. 길고 긴 숨을 참으면서 바다의 끝까지 걸었다. 


' 그래, 너와 함께 갈 거야. 그것은 이미 운명처럼 정해져있는 것이니까. ' 


나도 모르는 새에 나는 말한다. 


' 하지만 분명히 이 세계 어디엔가 내가 남겨야 할 것들이 아직 존재하고 있어. 그것은 나를 기리기 위한 일들이 아니야. 어쩌면 무척 보잘것없는 작업일 수도 있겠지. 몇 편의 글을 남기고 돌아올게. 나를 기다려주겠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잘 모르겠어. 그래도 끝까지 나를 기다려주겠어? 포기하지 않고. ' 


' 그럼, 물론이지. 나는 끝까지 너를 기다릴 거야. '


너는 살짝 웃는 듯이 보인다. 


이윽고 너는 영혼의 다짐을 한 듯 확신에 찬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흐물흐물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이 어둠 속에 일부로 돌아가기 위해. 이 세계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사라진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나의 그림자가 존재하는 이 세계의 이면, 어둠을 담당하고 있는 너란 존재는 어디에나 내 옆에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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