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가 지나가고 있는데도 여전히 너무 덥다니 놀라운 일이다. 오래간만에 긴긴 연휴를 맞아 나는 며칠을 푹 쉬었다. 또 그중 몇 날은 아무도 모르게 사무실에 나왔다. 추석 연휴였지만 상담 일정이 있었고 마침 전화를 해야 하는 의뢰인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둠이 내린 듯 고요한 사무실에 혼자 있으려니 마치 시간과 공간의 방에 들어온 것 같이 마음이 편하다. 다만 가을날을 잊은 이 무더위는 도대체 뭐지.. 정말이지 낮이고 밤이고 돌아다니기 어려운 뜨거운 날들이 계속되었다.
봄 사무실은, 상담들로 가득 찬 일정을 보낼 때에도 또 변호사님들과 각자의 방에서 열심히 서면을 쓸 때에도 모두가 퇴근한 이후 홀로 남아 블로그 글을 쓸 때에도 나에게는 가장 편한 장소이다. 지금은 따로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있지는 않지만 나는 이 공간에서 나를 찾아주시는 의뢰인분들을 만나고, 또 날이 저물면 사무실 근처나 집 근처를 슬슬 걸어 산책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오후부터 비가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스콜처럼 갑자기 쏟아져내리는 비였다. 나는 부스스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가 물을 끓였다. 오늘은 어떤 연락이 와도 받지 않아도 되는 연휴의 한 가운데 있는 날이다. 뿌연 수증기를 내뿜는 10년이 되어 가는 커피포트가 삐익 소리를 내면서 불이 꺼지자 나는 발리에서 가져온 붉은 라이스 티에 물을 부었다.
거실 테이블에 앉아 수저로 빙글빙글 붉은 쌀알을 돌리며 물이 좀 식기를 기다린다. 귓가에는 땅에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린다. 그야말로 완벽한 저녁이 아닐 수 없다. 해는 완전히 저물지 않아 밖은 어둠에 완전하게 물들지는 않았다. 짙은 남색의 하늘과 숨 막히는 무더위 덕에 며칠 전부터 예쁜 구름들이 보였다. 보름달이 떠 오른 한밤중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테이블에 앉아 라이스티를 마시며 어떤 글을 쓰는 것이 좋을지 오랫동안 고민하고 있었다. 문득 기침이 나온다(한 여름의 감기는 가을날의 무더위처럼 아직까지 나에게서 떨어지고 있지 않다).
연휴 중 봄 사무실에서 일을 한 날은, 차를 타지 않고 천천히 여유롭게 걸었다. 꽤 오랜 산책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고요함 속에서 내 공간을 정비(整備) 한다.
그리고 너에게 작년부터 내가 쓰기 시작한 글의 한 단락을 보여주었다. 작년에 쓰다가 멈춘 소설 '첫사랑, 그녀'.
' 이 글을 이어 쓰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새로운 글을 시작하는 것이 좋을지 잘 모르겠어. '
' 음, 한 번 보자. '
너는 나의 말을 듣고는 내가 보여주는 글들을 열심히 읽어 본다. 휴대폰 불빛에 비치는 너의 눈빛은 무척 진지하다. 사슴과 같이 맑은 눈이라고 나는 문득 생각한다.
' 음 ㅡ, 내 생각에는, '
너는 침묵을 끝내고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 괜찮아. 내 생각에는 이 글을 이어쓰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이 글은 재미있거든. 다만 이들은 너무 일찍 재회를 한 것이 아닐까 싶어. 어쩌면 다시 만나기까지 시간이라는 것이 더 필요할 것 같아. 또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그래야 납득이 되지 않을까? '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때까지 가장 궁금해하던 질문을 너에게 물어본다. 아무래도 이 부분은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화자가 남자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글을 보면, 정말 남자 사람으로 느껴져? '
나는 그것이 늘 의문이었다. 나는 여자의 심리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지만(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도 있겠지만) 여자를 화자로 하여 글을 쓰기는 이상하게 어렵다. 그 이유는 모르겠다. 글을 쓰는 작가들은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기에, 자신이 편한 대로 화자를 만들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여자가 남자 화자를, 남자가 여자 화자의 입장에서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여자의 일생을 쓴 모파상은 대단한 작가이며 또 여자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여자로 태어난 나는 늘 남자 화자로 글을 쓰는 것이 편하다. 사실상 여자의 입장에서 어떤 글을 지어본 적 자체가 없다. 아무래도 일평생 나의 마음에 빙의한다기보다는 상대방의 입장을 빙의하는 것이 편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너는 나의 마음을 읽은 듯이 ' 응, 남자야. 생각이 조금 많은 남자. 이런 남자는 현실에 존재할 수 있지. 분명 여자 같지는 않아. '라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이후에, '첫사랑, 그녀'의 캐릭터를 어떻게 만들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소설을 쓴다면 스토리도 중요하겠지만 캐릭터를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 일단 어떠한 캐릭터가 만들어지면, 그 이후에는 그들의 이야기를 그들이 이어가게 돼. 우리는 그냥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면 되는 거야. '
구름이 가득한 밤은 어둠으로 뒤덮였고, 눈부신 달은 어두운 곳을 눈부시게 비추고 있었다. 나는 또다시 길고 긴 밤 산책에 나섰다. 그리고 다짐했다. 소설 '첫사랑, 그녀'를 다시 써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