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일본에 다녀오는 길에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사회적으로도 그렇지만 내 마음적으로도 그렇다. 그리고 계절의 느낌이 바뀌었다. 어느 순간 한 겨울의 정점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모든 것은 하얗고 뿌리내리고 기존의 것은 낡고 닳아버렸다. 새로운 것들은 끝이 없이 변모하고 있었다.
나는 매일처럼 꾸준히 쓰던 글을 멈추고 잠시 한곳에 멈춰 서서 내 마음을 바라보기로 했다. 왜냐하면 나의 삶의 한 부분이 끝났고, 새로운 시절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의 인생에서 무척 중요한, 거대한 사건이었다. 그날 밤, 나는 눈을 감고 에노시마 섬으로 들어가던 다리를 떠올렸다. 섬의 바람은 세차게 불어왔고, 해는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면서 주위를 보랏빛으로 남색 빛으로 물들였다. 지*가 저 섬을 넘어가던 길목 어딘가에 후지산이 있다고 했다. 지금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날씨가 맑은 날에는 만년설처럼 눈이 내린 후지산의 봉우리를 볼 수 있다고.
나는 거침없이 섬으로 가는 다리를 건너갔다. 신사를 오르는 길은 끝이 없이 보이는 계단들로 가파르고 무척 힘들었다. 계단들 사이로는 예쁜 상점들과 디저트와 커피를 하는 카페들이 있었다. 중간쯤 올라갔을 때, 100엔에 운세를 뽑을 수 있는 곳이 신사의 한편에 마련되어 있어 친구에게 100엔을 빌려 신년운세를 뽑아보았다. 종이접기처럼 가닥가닥 접혀 있는 종이를 펼치니 예스러운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 종이에는 ' 처음에는 조금 힘들어도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라는 뜻의 글귀가 적혀있다고 했다. 굉장히 어설픈 말이지만 어쩌면 좋은 말이다. '결국에는'이라는 마무리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니.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늘은 꽤 오랫동안 주위를 보랏빛으로 물들였다. 선생님은 바깥에서 받는 마음의 상처를 언급하셨다. 바깥으로 나가면 온통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들 투성이라고.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서 쉬어야 할 것인가? 그것을 찾으려고 지난 10년을 방황 속에 살았던 것 같다. 어쩌면 자그마한 공간을 찾으려고.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장소가 너무나도 필요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나는 결국 누워있는 이곳에서 눈을 감고 반쯤 잠든 상태로 동결되어 버렸다. 이제 내 마음속에는 아무것도 없고, 그 안에 뿌리도 없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
그것이 12월 초의 나의 상태였다. 나는 눈을 감고 모든 것이 얼어있는 상태의 시간을 꽤 오랫동안 보내야 했다. 어디선가 끝도 없는 잠이 쏟아졌다.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 과거의 어느 시점에 빠져 있었다. 그것은 꽤 오래전의 과거였다. 처음에는 2014년의 어느 시점에 머물렀다. 죽음에 가까웠던 어느 때. 꽤 많은 사건들이 벌어졌던 해이다. 나는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의 유형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세심하게 나의 기억들을 선별해간다. 그리고 어떠한 기억들은 그 자체로 봉인을 하여 우물 속에 깊이 묻어둔다. 그것은 회피와는 조금 다르다. 나는 모든 기억들을 거의 정면으로 바라본다. 그로 인해 나는 꽤 여러 번 큰 피해를 입어야 했다. 물이 차오르고 해일에 뒤덮이는 재난과도 같은 피가 소리도 없이 흘러나왔다. 그 이후 나는 몇 가지 기억들은 모두 봉인하기로 마음먹는다. 그것들은 봉인되어 내 기억 속에 잠시 잊혀진다. 어딘가 뒤편으로 밀려나버린다. 마치 파도가 빠져나간 자리처럼.
나는 이미 방향성을 상실한 상태로 균형을 잃은 채 더 먼 과거로 내려갔다. 이번에는 2004년이다. 그때도 죽음에 가까웠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미 반쯤은 죽음에 가까워져 있었다. 나의 기억들은 어떤 것들은 마모되고 닳아버렸으며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봉인되었다. 그것이 바로 에노시마의 기억이다.
한 겨울의 때, 나는 마음을 비우고 눈을 감고 많은 것들을 정리한다. 그리고 최근에 내가 보았던 도도한 달을 떠올린다. 달은 늘 내가 속해있는 세계였다. 일본으로 가기 전 어느 날, 사무실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우연히 보았던 은빛의 달은 보통의 크기보다 지나치게 컸다. 며칠 뒤 나는 낮 1시에 떠 있던 구름 속의 하얀 보름달을 보았다. 그런데 그 달은 그다음 날 저녁 완전한 반달로 바뀌어 있었다. 무엇인가 착오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달의 착오나 어쩌면 내가 속한 세계의 변화. 나는 내가 속한 세계를 완전히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 언제까지 이런 일이 계속될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이 세계의 문이 완전히 닫혀버렸음을. 그리고 다른 길이 열려 있다는 것을. 세계가 바뀐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나는 좀 더 나아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완연한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기억들이 선별되어 다시 한번 우물로 내려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