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상처와 거꾸로 가는 기차 이야기.
오래전 태국 푸켓에 있을 때의 일이다. 나는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방콕에 머물다가, 기차를 타고 푸켓으로 넘어갔다. 숨이 막힐듯한 더위에 지쳐 나무들로 이루어져 있는 식당에 들어갔는데 십 분 정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땡모반을 마시면서 쉬고 있었던 것 같다. 푸켓은 유명한 빠통거리를 제외하고는 매우 한적한 곳에 가깝다. 사실 태국의 어디를 가도 그렇다. 길을 걷다 보면 천장 위에 거대한 팬이 돌고 있는 카페와 노상의 음식점들을 볼 수 있다. 팬은 천장 위에 달려 천천히 돌아가고 있고 얼굴이 까맣게 탄 주인아주머니는 보기만 해도 연식이 느껴지는 거대한 웍에 청경채, 쌀국수 등을 넣고 볶다가 계란과 숙주를 넣고 뒤섞고 있었다.
그곳의 익숙한 풍경들은 이곳이 이국의 거리이며, 나에게는 낯선 곳에 혼자 와 있다는 아련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외국에서 산 샌들을 오래도록 신고 있었다. 다리는 아팠고 등에는 땀이 흘렀다. 머리를 묶고 짚으로 만든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이글거리는 태양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나는 주로 기차나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짐이 많으면 안 되었으므로 주기적으로 옷을 버렸고 현지에서 새로운 옷들을 구매했다. 언제나 여름 날씨라 가능했던 일이다. 현지에서 계속 옷을 구매하다 보니 어느 순간 나는 외국인보다는 현지 사람들과 비슷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이처럼 나 스스로를 현지화시키는 것은 무척 편한 일이어서, 더 이상 나에게 물건을 팔려고 따라붙는 현지인들로부터 어느 정도 관심을 돌릴 수 있었고, 그 공기 속에 숨어 나는 나를 지켜내고 있었다.
그러다 그곳에 몇 년째 살고 있는 한국인을 만났다. 그 당시에 나는 여행 중에 현지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아무래도 그 즈음의 내가 한국에서 떠나 어쩌면 외국에서 살 생각을 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바다 위를 떠다니는 배 속에 올라타서, 목적지가 없이 부유하고 있었다. 때때로 닻을 잘라버리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세상과 내가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하늘과 지구를 이어주는 중력조차도 없다. 그 자유로운 느낌은 지금도 뼛속 깊이 새겨져, 보이지 않는 실처럼 가느다랗게 이어져 있다. 다시 말해 현재의 내가 아무리 세상의 많은 것들과 연결이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나의 존재를 각인하는 기억들은 어디엔가 새겨져 있는 것이다.
한 번 길을 잃어본 자는, 다시 한번 길을 잃었을 때 당황하지 않는다.
처음 길을 잃은 자는, 결코 완전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때 만났던 한국인은 남루한 태국 옷을 입고 떠다니던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태국으로 사실상 이주하여 한인 민박과 마사지샵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의 눈에는 무엇인가 쓸쓸한 느낌이 감돌았다. 말하자면 일종의 그림자와 같은 회색의 쓸쓸함이 온몸에 배겨져 있었던 셈이다. 그가 말했던 것은 자신이 헤어졌던 여자와 관련된 오래된 과거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우연히 음식점에서 만나, 땡모반을 마시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나에게 이 근처에서 가장 맛있는 해산물 음식점을 알려주었다. 나는 돈이 없어 그곳에 혼자 갈 수 없다고 대답하였고, 그는 그날 저녁에, 자신이 운영하는 한인 민박에 머물고 있는 다른 한국 사람들과 함께 가는 것을 제안했다. 시간이 아직 남아 있었으므로 나는 주스를 마시면서, 그리고 그 음식점에 있었던 한국어로 된 여행책자를 보면서 몇 시간을 쉬기로 했다.
그는 나를 마주 보고 앉아 자연스럽게 나에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음식, 날씨 등 가벼운 이야기, 그리고 점차 무거운 이야기, 어쩌면 마음속에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던 깊은 곳에 있는 이야기. 그에게는 그날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상대로 자신의 말을 털어놓지 않고는 못 배길만한 그런 날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평소의 그는 말수가 무척 적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 예전에 좋아하던 여자가 있었어. 굉장히 좋아해서 처음으로 결혼까지 생각했었지. 그녀의 가족들과도 몇 차례 만나기도 했었고, 구체적으로 언제 결혼을 하겠다는 일정도 잡은 상태였는데, 어느 날 감쪽같이 그녀가 사라져버렸어. 아무런 설명도 없이, 갑자기 말이야. '
그야말로 잠수 이별을 당한 그는 왜 그녀가 그렇게 사라져야 했는지 그 이유조차 듣지 못했다고 한다. 물론 그는 그녀에게 수십 차례 연락을 취해보다가 나중에는 본가에 그녀를 만나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러 내려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가깝게 지내던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은 한순간에 벼락을 맞은 듯 돌변했고 연락이 잘 닿지 않았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몇 달을 그녀의 집에 찾아갔는데, 결국 어렵사리 그녀의 어머니(그러니까 그에게는 예비 장모님이었던 셈이다)와 한 번 연락이 닿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사정에 대한 설명도 없었고 미안하게 되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더 이상 연락을 하지 말아 달라고 강경하고 냉정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것이 그들과의 사실상 마지막 연락이었다.
' 그녀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요? '
나는 물었다. 그러자 그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5초 정도 침묵했다. 나중에 그녀가 다른 사람과 결혼을 했다더라.라는 소문을 듣긴 했다고 한다. 하지만 완전히 잠수를 탄 그녀가 정말로 결혼을 한 것인지, 그렇다면 누구와 한 것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핸드폰 번호를 바꾸었고 소식을 알만한 sns 같은 것도 전혀 하지 않았다. 한 사람이 작정을 하고 잠적을 한 평범한 한 사람의 인생을 알아내는 것에는 당연히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는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집에 틀어박혀 있을 수 있는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검증했다. 어쩌면 그녀의 부모가 우리의 결혼을 반대했었나? 또는 갑자기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나? 하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어떻게 그렇게 본가의 사람들과 즐겁게 결혼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까? 단 며칠 전까지도 이상한 낌새는 없었다. 구체적으로 언제 결혼을 하자는 말까지 서로에게는 여러 차례 오고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새삼스럽게 결혼을 반대할 이유가 있을 리가 없다. 곧 결혼을 하려고 구체적인 마음까지 먹고 일상을 공유하던 그녀가 갑자기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왜 그런 식으로 이별을 해야 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 또한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사랑하던 그녀가 갑자기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처음에는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는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이 일로 깊게 상처를 받았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게 베어진 상처였다. 대부분의 상처는 아물지만, 어떠한 상처는 너무 깊어 잘 봉합되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스스로 상처를 제대로 보지 않는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인데도 말이다. 그는 몇 년 뒤에, 다른 여자를 만났다. 그런데 그 여자는 다른 남자를 만나면서도 그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그는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고 여자와는 바로 헤어졌다. 얼마 뒤 선이 들어왔고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어 또 다른 여자를 만났다. 그는 그 여자와 몇 개월을 만났지만, 어떤 느낌도 들지 않았고 그녀의 요구에 따라 헤어졌다. 누군가와 헤어지는 것도 만나는 것도 그에게는 일상처럼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마음의 한곳이 어쩌면 부서져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부서진 마음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굳어져갔다. 그는 그렇게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깨달았다고 한다. 결국 그녀는, 어떠한 이유에서건 자발적으로 나에게서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의지라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과의 제대로 되지 않은 이별은 그의 진심에 깊은 상처를 주고 또 오랜 시간을 괴롭게 만들었다. 그는 어느새 50살이 넘었다. 지금은 혼자 있으면서 그때의 일을 생각해도 더 이상 괴롭지는 않다고 말한다. 이제는 그녀가 결혼을 했든 아이가 있든 궁금하지도 않다고 말한다.
나는 그를 보면서 거꾸로 가는 기차를 떠올렸다. 우리는 모두 풍경을 보며 완만하게 스쳐가는 기차를 타고 있다. 그때의 나는 그랬다. 내가 보는 풍경들은 하나같이 모두 뒤로 사라졌고, 기억의 저편으로 멀어져 갔다. 그 기차는 빠를 때도 있고 느릴 때도 있었다. 어떠한 풍광은 내 마음의 적요를 감싸고 마음 깊이 남아 있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간들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 많은 일들을 모두 내 마음속에 담아둘 수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되었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고, 모든 현상은 머무르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거꾸로 가는 기차를 타고 하나의 풍경만 계속해서 보고 있었다. 그 상처로부터 마음을 완전히 닫고, 그 오랜 시간을 그저 버텨온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가 보는 상은 흐릿해졌고 무뎌졌지만 그렇더라도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워 보였다.
가장 힘든 시간은 가장 큰 성장의 발판이 될 수도 있다. 만약 그 상처를 마주 본다면, 그리고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아픔을 받아들인다면. 하지만 이미 무력한 그에게 내가 어떤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나는 그에게, 그는 나에게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풍광이 되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