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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분리 작업의 결말.

실체는 좀 더 선명한 색을 가지게 되었다.

by 정현주 변호사


요즘에는 제대로 된 아무런 글도 쓰지 못한 채 늦게까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하얀 눈이 소복하게 내리던 밤, 나는 해가 지는 들녘의 어디에도 붙들리지 못하고 흔들리던 이리의 눈을 떠올렸다. 그는 추운 겨울 은은하게 번지는 따뜻한 벽난로의 온기를 그리워했다. 따스한 기운이 번져 나오던 붉은 벽돌 집에 몸을 부비며, 새벽이 되도록 눈을 감고 하얀 눈을 맞고 있었다. 그럴 때면 사나운 마음속의 이리는 그를 그토록 비웃고는 ' 너는 그런 따뜻한 세계와 어울리지 않아. '라는 말을 던지곤 했다. 이미 뼛속까지 알고 있었던 자명한 사실이었다.


이제 그 시절은 모두 지나가버렸다. 울렁거리며 차오르던 벅찬 마음도, 온통 괴로운 마음에 서성이며 헤매이던 마음들도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은 채 소멸했다. 나는 깊게 잠들었다. 그 누구도 깨울 수 없는 폭력적인 잠이었다. 꿈을 꾸었다. 우물의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려다 보니 마음을 조금 기울여야 했다. 그 소리를 듣기 위해 나는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고 헤어나갈 생각이 없이 검은 강의 바다에 몸을 뉘었다. 일정하게 들리는 검은 강의 파다의 차오르는 파도 소리, 온통 그림처럼 걸려 있던 그 어느 날들의 기억들이 꿈속에는 그대로 박제된 채 남아 있었다.


아마 그때에, 나는 새벽에 일어나 몇 잔의 와인을 마셨지만 도저히 취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단 몇 개월 전만 해도 어색하기 그지없었던 새로운 마을을 산책 삼아 걸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이 유난히 길었던 그 해 여름, 지겹도록 들었던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어디선가 메아리처럼 들려왔었다. 아마 다른 세계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고막을 통해 울려 퍼지는 그 단촐한 소리는 단 몇 개월 만이지만 무척 그리운 마음을 들게 했다. 여름이 끝나가는 것이 아쉽다는 듯, 끊임없이 울어대던 매미 소리 대신 내 귀를 감도는 것은 한없이 투명한 적막이었다. 눈이 오는 날은 세상의 소리가 모두 소멸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내 마음의 실이 끊어졌다고 느꼈던 것은 그다음의 일이다.


그림자 분리 작업이 완전히 성공을 한 것이다. 나는 그림자를 그쪽 세계에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채 교묘하게 실체만 빠져나왔다. 대부분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그림자와 실체는 닮아있기도 했다. 모든 감정적인 언어와 묘하게 웃는 얼굴이. 그리고 일을 하는 감각이.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도 어딘가 비슷하다. 그림자와 실체 그 둘은 서로에 대하여 지나치게 이해를 하고 있지만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는 역할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부적으로 은밀하게 일어나는 일이었으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당연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리가 된 이후, 그림자와 실체의 격차는 조금 더 벌어지기 시작했다.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의 변화였다. 나는 다른 세계에 남아있는 몇몇의 인물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오로지 그림자만 기억할 터였다. 하지만 그림자와 실체가 그토록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실체 쪽이 그림자의 색을 대부분 가져가버렸기에 생긴 일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할 사건이기도 하다. 어떻게 그림자가 빠져나간 그 틈만큼의 균열이 실체로서는 완전한 색으로 면모하게 되었을까? 실체는 그림자와 합체되어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선명한 색을 띠게 되었다. 지금의 실체가 궁금한가? 어떻게 하면 실체를 볼 수 있을까?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실체 쪽에서 선택한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실체는 완전하며 견고한 세계 속에 있다. 그 세계는 이제 (과거와는 달리) 실체의 선택으로만 닿을 수 있다. 그리고 실체는 많은 문들을 닫아버렸다. 이 일은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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