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10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지금은 비어져 있고 명확해져 가고 있지.

더욱 더 실체가 보이는 곳에 있다.

by 정현주 변호사 Mar 11. 2025


생각해 보니 과거와 입맛이 많이 변했다. 예전에는 달달한 디저트를 보면 쇼케이스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고 커피를 시키면 반드시 케이크를 시켜서 함께 먹곤 했다. 케이크 중에서도  '타르트'나 '파이'를 좋아했는데, 특히 딸기 타르트를 정말 좋아했다. 그 당시에는 파리크라상에 가면 딸기 타르트를 늘 볼 수 있어 항상 한 조각씩 사서 아껴먹었던 기억이 난다. 


나른한 주말 오후에는, 친구와 파리크라상 올림픽공원점에 가서 부라타 치즈를 가득 올린 토마토 파스타와 머그컵에 가득 든 뜨거운 커피와 딸기 타르트를 시키고 쏟아져 내리는 햇빛을 맞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딱 지금처럼 겨울이 물러가고 봄이 찾아오는 그 시점이다. 우리는 공원을 걸으면서 바람에 쏟아져 내리는 듯한 잎사귀들의 소리들을 듣곤 했다. 걷다 걷다 지치면 눈에 보이는 아무 카페에 들어가서 쉬곤 했던 것이다. 


그 어느 날의 기억이다. 


' 요즘은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옛날의 기억들이 떠올라. ' 


' 어떤 기억? ' 


' 아주 오래전의 일들이지. 20년도 더 전의 이야기야. 이를테면 우리가 같이 인도의 자이살메르에 갔을 때 보았던 그 이름 모를 열매 있지? 먹으면 죽는다고 했던. 무화과 같은 모양에 초록빛을 띄고 좀 괴상하게 생긴 그것을 나는 사막에서 발견해서 백팩에 넣고 다녔었어. 사막에 널려 있던 과일이었는데 사막에서 보는 인도인들이 모두 한 마디씩 던지는 거야. 그것을 먹으면 반드시 죽게 된다고. 그때는 왜 그렇게 죽음이 매혹적이었는지. 백팩에 '죽음'을 넣고 다니는 기분은 그 자체만으로 살아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만들었어. 마치 어둠을 가지고 있으면서 빛을 느끼듯이. ' 


' 그래, 하지만 그 열매를 실제로 먹었다고 해도 분명히 죽지는 않았을 거야. 대신 위장병 같은 것에 걸려서 엄청 고생을 했겠지. 그래도 죽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 '


' 맞아. 그럴지도 모르지. 실제로 죽음까지 이르지 않았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때는 그토록 좁은 세계에 있었으면서도 나는 무엇인가 삶의 무게에 짓눌리는 기분이 들어 그 먼 인도에까지 갈 수밖에 없었는가 봐. ' 


' 지금은 어때? ' 


라는 너의 질문에 나는 눈을 감고 내 얼굴을 어지럽히는 바람을 느꼈다. 그 바람은 투명했고 한기를 잃은 따스함이 있었다. 문득 며칠 전까지 나를 괴롭히던, 몇 가지 기억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최근의 일이다. 어느 날 나는 나를 둘러싼 세계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적어도 10년 만에 느끼는 감각이었으며, 이번에는 오히려 그 10년 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본격적으로 달라질 것이라는 것을 나는 예감했다. 아마도 그 변화가 시작된 것은 가마쿠라 에노시마를 다녀온 지 얼마 안 되었던 때였던 것 같다. 그곳은 매우 이국적이었으며 새로운 세계로, 그 거친 풍광은 지난 것들에 대한 결별과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지난밤, 나는 오래간만에 자전거를 타고 대로변을 달렸다. 한참을 달리다가 불이 켜진 무인양품에 충동적으로 들어가 닭고기와 죽순으로 만든 솥밥 밀키트와 몇 가지 주방용품들을 사고 다시 자전거를 타고 돌아왔다. 


낮에 깊게 잠든 덕분인지 밤은 끝이 없이 이어졌는데, 아무래도 잠이 오지 않아 술에 취할 셈으로 하루 전날 사둔 와인을 한 잔 마셨다. 하지만 전혀 취하는 느낌은 없었다. 방이 조금 더운 듯한 느낌에 불투명한 한지처럼 되어 밖을 볼 수 없는 문을 약간 열었다. 밤의 바람은 아직 추워 바깥의 창문을 열지는 않고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다가 서랍에 잠옷을 꺼내어 천천히 옷을 갈아입었다. 머리를 푸르니 어느새 머리는 무척이나 많이 자라 가슴팍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고 파마는 대부분 풀려 이제는 생머리로 보였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슬슬 거실로 나가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았다. 모든 것은 밤에 묻혔다. 어느 순간 시간은 소리를 내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영원해 보이는 밤이 대신하여 그곳에 남아 있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여전히 그 광활함 속에 있다. 


' 지금은.. ' 나는 너의 말에 그때의 기억을 멈추면서 말한다. 


'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 더 명확해지고 있지. 나는 이제 헷갈리지 않아. 분명한 것들을 찾고 싶어. 그리고 그곳에 실체를 두고 싶은 거야. ' 


' 그래, 너는 이제 찾을 거야. 완전히 비어졌으니까. ' 


' 내가 완전히 비어졌나? ' 


' 응, 이제는 그런 것 같아. 사실은 무엇인가 비어져야 그 자리가 채워지는 법이니까. '


너의 말을 듣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 완전히 비어졌나? 그도 그럴 것이 과거의 기억들이 드문드문한 조각들로 걸려있다. 내 기억의 대부분은 오랜 기간의 방황의 때다. 그리고 그 기억 저편에는 언제나 흔들리는 내가 어렴풋하게 존재하였지만, 지금은 빈 공간에 서 있다는 것을 느낀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 그렇기에 더욱더 실체가 눈에 보이는 곳에. 



매거진의 이전글 마음은 빈배가 되었다.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