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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남긴 영혼의 일부가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일까?

by 정현주 변호사



이번 연휴는 꽤 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한국에 계속 머무르고 있지만 계속 외국에 여행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달까? 아마도 내가 다른 세계 속에 머무르고 있는 까닭이겠지. 여행이란 나에게 다른 세계 속에 잠시 잠겨드는 것을 의미한다. 아예 모르는 곳으로 떠나 그곳 사람들의 삶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때 나는 걸리버가 되어 잠시 그곳 세계의 사람(또는 이방인)이 된다. 삶 속에 녹아든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여행이다.



며칠 전, 비가 오는 날의 일이다. 나는 잠겨드는 빗물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있었다. 세차게 내리는 비들이 아스팔트 바닥을 사정없이 때리고 있었으며 그것들을 밟고 지나가는 차들이 지나간 자리에 차오르는 하얀 기포와도 같은 물들이 솟아오르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나는 그때 읽고 있던 책을 들고 테리타스라는 카페로 들어갔다. 한때, 무엇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었을 시절에는 하루에 어느 때라도 마음 편하게 책을 읽으면서 뜨거운 커피를 마시곤 했다. 집 밖을 나서면 강아지풀처럼 깔려있었던 초록 초록한 토성을 가로질러 늦은 오후까지 산책을 하기도 했고, 밤늦은 시간까지 집 바로 앞에 있는 음악 연습실로 들어가 몰입하던 곡을 연습하기도 했다(나는 한 곡을 완성하기 위해 최소한 6개월 이상을 연습하곤 했다).



많은 상념의 시간들이 지나갔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이 사람들과의 본격적인 교류는 없었으며 오래전부터 연락이 이어지고 있는 일부의 사람들과만 드문드문 연락을 나누었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는 꽤 깊은 곳까지 교감할 수 있었지만,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대부분의 세계는 내가 머물기에 적당하지 않거나 또는 어느 시점부터는 자연스럽게 가야 할 때라고 인식하였던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동반자를 찾아 떠나는 기나긴 여행을 하고 있다.


그것은 물론 우주적인 이벤트이다. 동반자를 찾고 만난다는 것은.






돌이켜보면 나는 언제나 너를 생각했다.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어디에서든 너를 떠올리고 있다. 너는 어쩌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여운이 되어 시간이 갈수록 그 색을 더 선명하게 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하나의 세계가 닫힐 때, 그 세계는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가교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분명히 그곳을 떠나왔음에도 내가 남긴 영혼의 일부가 그곳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곳에 남겨두었는지도 모른다.



그날, 너는 나에게 말했었다. ' 너는 누군가가 필요해? '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자조 섞인 목소리로 덧붙였다. ' 나는 이제 다른 선택을 했어. 이제 그 선택은 더 이상 빛나는 선택이 아니야. ' 마침 너가 앉아 있었던 자리는 어두워서 나는 너의 얼굴을 제대로 살펴볼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그 겨울, 어쩌면 마지막이 되었을 그 자리에서 너는 한때 분명히 존재했던 뜨거운 마음의 한켠을 내비쳤던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너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너는 나에게 '완전한 세계'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왜 우리의 나약하고 부서진 결핍에 대한 이야기를 생략했는지를.



한때 부서져버린 세계에 있었던 나는 마치 길게 흐르는 교향곡의 1악장이 끝이 나고 2악장이 시작되는 그 간극에 빠져버린 듯이 다른 세계로 넘어오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어쩌면 그림자를 두면서 영혼의 일부를 남겨두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다 끝나버린,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여전히 나의 실체를 두어야 할 곳을 찾고 있다. 그리고 나는 가능성을 보았다. 걸리버 여행기의 걸리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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