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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영원히 사람을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by 정현주 변호사


나는 나그네로 태어났다. 언제나 길을 떠났고 한곳에 머무르지 않았으며 가장 가치로운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나의 삶은 언제나 불명확했고 언제든 손을 놓으며 떠날 수 있는 기로에 서 있었다. 위태로운 히말라야산맥을 오르고 낯선 곳에서 잠을 청했다. 사람을 믿지 않았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언제나 사나운 이리와 같이 나의 약한 부분을 파고들며 내가 언제든 머물러주기를 원했다. 그 일이 반복되면서부터 지쳤던 나는 그림자를 남겨두고 우물로 내려가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그날, 나는 다람살라에서 마니차를 돌리며 지나가는 티벳인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여전히 노트를 들고 있었고 다즐링 차를 마시고 있었다. 다즐링의 새벽은 차갑고 언제나 안개로 가득 차 있다. 공기는 서늘하고 도시는 시멘트색이다. 새벽이 오면 다즐링의 사람들은 숨죽여 일어나고 하나둘씩 가게의 불들이 켜진다. 나는 베란다에 앉아 불빛을 보며 다즐링이나 아쌈차를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곱게 빻은 찻잎에 뜨거운 물을 부어 잔속의 물이 붉게 번져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았다. 뜨거운 수증기에서 피어오르는 알싸한 향기, 입가로 번지는 씁쓸한 맛은 오래전 너와 예당 근처에서 함께 마신 고종의 아침 커피를 떠올리게 했다.


우리는 늘 예당에서 음악을 들었다. 어떤 때는 교향악을 들었고 어떤 때는 피아노 협주곡을 들었다. 그것이 사실 어떤 음악이든, 크게 상관이 없었다. 학교를 파하고 예당으로 와 음악을 듣는 것이 중요했다. 커다란 홀에서 연주를 하기 전 음을 맞춰보는 그 분위기를 나는 좋아했던 것 같다. 한국이었지만 예당의 홀은 외국을 여행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어떤 곡이 나와도 나에게는 늘 일종의 감동을 주었던 것이다. 공연이 끝나면 우리는 고종의 아침으로 가서 갓 내린 커피와 그곳에서 만든 쿠키를 먹었다. 가끔은 악기 연주자들이 회식을 위해 자주 가는 와인바에 함께 합류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음악 이야기들을. 악기 연주자들의 삶을. 그날 공연했던 슈베르트나 베토벤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우리는 주의 깊게 들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나는 피아노를 좋아했다. 자주 듣던 라디오에서 쇼팽의 피아노 곡을 들은 이후 간절히 피아노를 치고 싶어, 마우리치노 폴리니의 카세트테이프를 산 다음 수도 없이 쇼팽 에튀드를 듣곤 했다. 내가 살던 집 지하에 있었던 교회당의 피아노는 나의 것이 아니었지만 유일한 반주자인 나만 칠 수 있었다. 나는 차갑고 딱딱한 시멘트 바닥 위에 놓인 그 갈색 피아노를 사랑했다. 나로서는 외롭고 적적한 마음을 소중히 담을 그릇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일종의 고향과도 같은 위안을 늘 바라고 있었으므로 나는 피아노에게 몰입을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 너가 그토록 예민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


너를 만난 것은 피아노를 사랑하는 시간들을 보내고도 한참 뒤의 일이다. 우리는 예당을 가는 것 외에도 베를린 천사의 시와 같은 아무도 보지 않는 저예산 독립 영화를 보거나 산책을 하거나 커피를 마시러 다녔다. 종종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음악을 들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그 세월이 좋았다. 나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너가 좋았다. 늘 그곳에 머물고 있는 너가 안심이 되었다. 수많은 세월 동안 나는 언제나 길을 떠났고 헤매었으며, 다시금 예당으로 돌아와 너와 함께 음악을 들었고 함께 다즐링에서 직접 가져온 차를 우려서 마셨다. 어쩌면 나는 마음을 담을 소중한 것들을 찾아 그토록 오래도록 떠나 있었는데, 안전하고 견고한 너를 만나 그토록 성장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금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만약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영원히 사람을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빛나는 것들이 존재하고 그것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나만의 닻을 올려야 한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잘 알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나는, 너의 존재함으로 나 스스로 존재하며 많은 것들을 받아들이고 내가 가야 할 곳을 명확하게 바라볼 수 있는 내면의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로 인해 나는 나를 외면하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한 사람의 존재로서 살아나가게 된 것이다.


사람은 어쩌면 한 사람을 지극히 사랑함으로 나 스스로 또는 상대를 변화시키게 하기도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은 주로 혼자로서의 시간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나에게 좋은 사람과 함께 함으로써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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