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빈 공간(空)에서 태어나 흙으로 되돌아간다

이 유한한 삶에서.

by 정현주 변호사


한때는 피아노에 빠져 있었다. 당시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집 근처의 낡은 연습실에 가서 연주회를 준비하는 입시생처럼 피아노를 쳤는데, 너무 집중을 하다 보니 손끝이 아려올 정도였다. 내가 살았던 풍납토성 근처는 늘 멀리서 풀피리와 같은 바람이 불었다. 양떼들이 노니는 정겨운 언덕과 같이 푸르른 잔디가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나는 십 년도 더 넘은 파일 안에 치고 싶었던 곡들을 복사하여 백팩에 소중히 넣어두고 늘 그곳을 걸었다. 느릿느릿, 그야말로 토성에 놓인 한 마리의 양처럼. 지금처럼 숨이 막힐 정도로 온도가 높고 땅에서는 아지랑이처럼 열이 피어오르는 날들이었다.


어느 무더웠던 밤, 글을 쓸 수 있는 마법의 가루가 사라져 버렸어.라고 나는 말했다. 짧아진 머리 뒤로 비치는 거울에 놓인 나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낯선 눈을 가진 내가 마치 다른 사람같아 다른 섬에 온 듯 생경하다. 하늘을 보니 멀리서 몸뚱이가 큰 까마귀가 건물 끝에 앉아 목청껏 울고 있었다.


그 밤에 나는 처음으로 주근깨가 가득하고 머리를 귀밑으로 짧게 자른 희재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의 붉고 날렵한 아름다운 입술을 생각한다. 희재는 주로 은색의 작은 귀걸이를 하고 있었는데 몸을 움직일 때마다 머리끝으로 언뜻 언뜻 빛나는 그것은 일종의 종을 연상케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다람살라에서 들을 법한 아름다운 종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던 것이다. 나는 아련한 한 마리의 사슴을 떠올렸다. 그 우아한 움직임에 늘 감탄하고 말았다.


' 너의 실체는 이제, 어디에 있는거야? '


그녀는 나에게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늘 알 수 없는 곳에서 배회하는 고동색의 낡은 촛대와 같이 어딘가 사람을 끄는 데가 있었다.


이제, 무엇을 하고 싶어?


나는 그곳에 앉아 이미 내 마음속 앨범 속 어딘가에 저장해두었던 층고에 오른다. 나의 시간은 멈춰있고, 마법의 가루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나는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나는 언젠가 너에게 고백했다.


나의 영혼은 지금까지 다녔던 도시 곳곳에 흩어져 버렸다고. 나에게는 노스텔지아*가 없다고.


나는 그 사실을 꽤 늦게 깨달었던 것 같다. 고향을 잃은 난, 꽤 오랫동안 방황을 했다. 하지만 흩어진 영혼을 찾기를 포기하였으며 종국에는 고향을 잃었거나 어쩌면 이미 사라져버린 방랑자의 삶을 받아들여야 했다. 많은 풍경들을 눈에 간직하고 기억하였으나 그것을 되감을 시간이 부족하였던 것인지 나는 한곳에 멈춰 서서 내가 느끼는 생경한 감동들이 그대로 나를 스쳐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빈 공간(空)에서 태어나 흙으로 되돌아간다.


이른 저녁, 나는 도도하게 떠 오른 보름달을 바라본다. 이 낡고 서걱거리는 밤 하늘은 눈을 감은 나의 얼굴 위로, 짧아진 머리 위로 내리는 여름날의 눈송이처럼 외롭다.


나에게는 왜 이렇게 모든 것이 서투르고 낯선지 모르겠다. 몸을 잔뜩 구부린 산 속의 흙 벌레처럼, 익숙한 곳으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문득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전에 이곳에 아름드리 나무와 같이 사랑을 뿌리내리기로 한다.

나에게 각별한 사람들이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도록. 어쩌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나의 망망대해와 같은 자유로움으로 상처받지 않도록.


하지만 나의 실체는 이제, 나에게 특별하며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사람들에게만 머물 것이다.


어쩌면 그런 세심한 선택을 위해 지금까지의 시간을 보내왔는지도 모르니까.





뭉크, 사랑의 파도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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