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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주 변호사 Apr 17. 2023

첫사랑, 그녀(7)

어느 날 밤 jazz bar에서.

공모전을 준비하던 시절,  나는 그녀와 거의 일주일에 한 번 꼴로 한남동의 카페에서 만나 커피나 차를 마셨다. 가끔 시간이 조금 남으면 그녀가 좋아하는 영화를 보러 종로에 있는 극장에도 가곤 했다. 한남동에서 가까웠던 덕분에 아무래도 종로를 자주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도 우리가 자주 가던 '카페 뎀셀브즈'라는 카페가 있었다.


'카페 뎀셀브즈'는 종로 사거리에 지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멋들어진 복층 카페로 그 이름부터 내부 인테리어까지 당시에 우리에게는 획기적으로 멋진 곳이었다. 카페에서는 여러 가지 원두의 핸드드립 커피를 팔았고 2층으로 커피를 들고 올라가면 바로 앞에는 넓은 통창이 있었다. 나는 그녀와 영화를 보고 나오면 늘 그곳에 들러 커피를 마셨다. 우리는 누가 먼저 말을 꺼낸 바 없음에도 늘 자연스럽게 2층에 올라가 통창을 마주 보고 나란히 앉아 사람들이 거리를 다니는 광경을 보곤 했다.


그런 때의 그녀는 주로 방금 보고 나온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야기에 집중하는 그녀의 볼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고 눈은 반짝거렸다. 그 순간의 나는 공모전도, 막막하게 느껴지던 미래의 일들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카페 뎀셀브즈에 함께 앉아있던 그녀와 나를 둘러싼 공간은 현실의 세계와 단절되어 전혀 다른 곳에 존재하는 듯했다. 그곳에 있는 그 누구도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으리라.  


생각해 보면 꽤 자주 둘이서만 만나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가 이 만남을 데이트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물론 나는 그곳에서 이야기를 하느라 상기되어 있는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휩싸일 때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나를 생각보다 ㅡ 어쩌면 무척 ㅡ 의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떤 이유에선가 나는 그녀에게 나의 마음을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내가 무리하는 순간, 이 관계는 분명히 끝나버릴 것이다. 그것은 묘한 기시감(旣視感)이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아련한 감각이었다.  


물론 감정을 참기는 어려웠지만 나 또한 막상 그녀의 손을 잡게 된다면, 만약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다면 그 이후의 과정을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는 실망하여 나를 떠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렇더라도 멈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많은 것들을 조금 더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안정감을 주기 위해서는 나에게도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 대한 나의 충동적인 마음은 깊이 억누르고 억눌렀다. 한편으로는 이 만남을 그르치고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더 무엇인가를 하지 않고 그녀와 애매한 사이로 남은 채 비슷한 장소에서만 그녀를 만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날은 오후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나는 며칠 남지 않은 공모전 준비를 하느라 집에 틀어 박혀 며칠간 어디에도 나가지 않고 그림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 바쁘지 않으면, 오늘 만날래? "


" 지금? "


나는 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저녁 6시를 훨씬 넘어 7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이 시간에 그녀가 만나자고 말하는 것은 무척 드문 일이었다. 물론 우리는 낮부터 저녁 늦게까지 함께 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지만 그녀가 낮을 건너뛰고 저녁에 먼저 전화를 걸어 나에게 만나자고 하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 응.. 너 지금 그림 그리고 있었던 거 아니야? 내가 지금 흐름을 끊은 것은 아니지? "


전화 너머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부드럽고 조금 느릿했으나, 오늘따라 다소 멀게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방금 전까지 작업하고 있었던 그림을 흘끗 보았다.


그것은 이제 스케치를 넘어 배경색이 채워진 상태였다. 아직까지는 어떤 형태가 나올지, 어떤 색이 될지 정해지지 않았다. 최근까지 나는 아무런 상(像)도 떠올릴 수 없어 며칠간을 하얀 도화지만 노려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어떤 때는 밥 먹는 것 마저 잊고 내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올라오기만 기다렸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며칠을 보내고 어렵게 스케치를 시작하자 밑그림은 다행히 실타래가 풀리듯 잘 진행되었다. 어떤 작품이라도 제대로 몰두를 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그리고 일단 몰두를 하게 되면, 그 이후에는 시간의 싸움이었다.


" 응 괜찮아. 바쁘지 않아. 어디에서 볼까? "


집중이 필요한 타이밍이었지만 나는 거짓말을 하고 그녀가 불러주는 주소를 받아 적었다. 잠깐이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면서.


그녀가 불러준 장소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재즈바(jazz bar)였다. 이 시간에 전화를 한 것도 흔치 않았지만 술집으로 불러내다니 평소의 그녀답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처음에, 그녀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친구든 누구든 다른 누군가가 같이 있는 건가.라고도 생각했다. 그곳은 간판이 잘 보이지 않는 가정집을 개조하여 만든 곳이었고 주위는 주택가가 많아 무척 조용했다. 이런 조용한 곳에 jazz bar가 있다니 놀라웠다.


칠흑처럼 어두운 밤이었다. 차로 가까이 다가가자 주택처럼 지은 건물 바로 앞에는 사람 얼굴 정도 크기로 작은 blue라고 써져 있는 간판이 보였다. blue는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한 빛을 내고 있었다. 그 바로 밑에는 까만색의 작은 흘린 글씨체로 jazz라고 쓰여 있어 여기가 jazz bar라는 것을 은연중에 알게 해 주었다. 마치 알 만한 사람들만 찾아오는 밀회의 장소처럼.


나는 택시에서 내려 우산을 펼치고 지하로 통하는 입구로 들어갔다. 계단은 생각보다 길고 가파랐는데, 아마 방음을 위해 일부러 더 깊이 만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침내 도착한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다. 가운데 홀에는 까만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었고 드럼도 있었다. 당연하지만 모두 한국인으로 보이는 연주자들이 마침 짐짓 심각한 얼굴로 연주를 하고 있었다. 드럼 앞에는 파란색의 딱 붙는 원피스를 입은 젊은 동양여자가 동그랗고 높은 의자에 엉덩이를 반쯤 걸친 채로 앉아 눈을 감고 'fly me to the moon'을 부르고 있었다. 얼굴과 달리 매우 허스키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홀을 중심으로 자리들이 겹겹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홀 중심으로만 불이 켜져 있어 객석은 무척 어두웠다(그것은 마치 어둠 속에서 불빛으로 향하는 나방을 연상시켰다). 눈이 어둠에 적응할 때까지 기다리며 나는 찬찬히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오른쪽 끝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어깨너머로 푸르고 딱 붙는 핑크색(으로 보이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자리에는 와인잔 말고는 안주로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가 맞은편에 앉았다.


놀랍게도 그녀의 오른손 중지에는 심지에 불이 붙어 있는 얇은 담배가 끼워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바로 앞에 이미 두 개의 다 태운 담배가 구겨져 있는 재떨이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내가 바로 앞자리에 앉자, '왔어?'라고 말하면서 아주 잠깐 눈길을 던지더니, 담배를 입에 가져가더니 그것을 물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아주 오랫동안 담배를 피운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 담배 피웠어? 언제부터? '

  

나는 그녀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놀란 마음에 바로 묻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녀와 2주 전까지도 같이 영화를 보고 함께 커피를 마셨다. 물론 그전에도 우리는 몇 년 동안을 꽤 자주 만났다. 하지만 난 단 한 번도 그녀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물론 그녀에게서 담배 냄새를 맡은 적도 없었다. 나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담배 냄새를 완전히 숨기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대체 언제부터 담배를 피웠던 것일까? 나한테 왜 숨겼던 것일까? 아니면 나랑 만나지 않는 2주 동안 갑자기 담배를 배운 것일까? 나는 순간적으로 이런저런 생각들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평소와 어딘가 좀 달라 보였다. 바로 앞에 앉아 있는 그녀는 평소보다 화장이 진해 보였고,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몸에 달라붙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지금까지는 맡아보지 못한 옅은 향수 냄새가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 뭐 마실래? 너도 와인? "


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쳐다보면서 그렇게 말하더니, 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듯 담배를 들고 있던 손을 들어 같은 와인을 두 잔 더 주문했다. 그리고 반 잔쯤 남아있던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마침 파란 원피스의 여자가 부르는 fly me to the moon은 클라이맥스를 향하고 있었다.   


" 많이 마셨어?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야? "


나는 놀라고 걱정되는 마음에 그녀에게 물었지만 마침 곡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드럼 소리에 내 목소리는 완전히 묻혀버렸다.  


" 응? 뭐라고 했어? "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 너 괜찮냐고! "


나는 목소리를 조금 크게 높여서 말했다. 그 순간 나의 말을 이해한 그녀는 시끄러운 주위를 의식한 듯 입 모양으로 천천히 ' 응 괜찮아. 나 무척 기분 좋아.' 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침 종업원이 놓고 간 와인잔을 들고 내 눈을 보며 살짝 웃었다. 장난기가 섞인, 무척 자유로운 웃음이었다.


그 웃음을 보자 나는 참을 수 없는 마음이 들었다. 그녀의 진짜 모습을 전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껏 내가 알고 있던 그녀와 지금의 그녀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다른 사람같이 느껴졌다. 파란색 원피스의 여자가 벌써 4개 째의 곡을 부르고 있는 동안 그녀는 계속 담배를 피우면서 와인을 마셨다. 우리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반쯤은 체념한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가끔 웃어주는 그녀의 눈을 마주보면서 함께 와인을 마셨다. 그 시간속에서 나는 나의 형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마치 껍데기만 남아있는 듯 나는 이 곳에서 해야 할 일들을 완전히 놓고 다른 곳에서 오롯이 그녀와 함께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사실은 이 곳에 내 알맹이가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 곳에서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비로소 닫혔고 음악 소리만 귓가에 잔향처럼 번졌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오른손으로 그녀의 왼쪽 손을 맞잡고 왼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겨 당연한듯이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손으로 전해지는 그녀의 온기, 그녀의 모습은 오래도록 이런 상황을 원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입술에서는 옅은 담배의 끝맛이 감돌았다. 오래전 내가 버렸던 그 담배의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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