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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주 변호사 Apr 23. 2023

첫사랑, 그녀(8)

나는 오랫동안 이런 순간을 기다려왔어.


그리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blue에서 나와 나의 작업실이 있는 오피스텔로 향했다. 밖으로 나와 택시를 타고 오피스텔로 달려가는 동안 어둠은 더 짙어졌고 빗방울은 더욱 거세졌다. 우리는 택시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택시 안에서 그녀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고 나는 오른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왼손으로 그녀의 손을 맞잡고 있었다.


취할 정도로 와인을 마신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이미 충분히 취한 사람처럼 얼굴이 달아올랐다.  쿵쿵거리는 내 심장 소리는 귓가에까지 들릴 정도로 가까웠다. 나는 그 순간 내 어깨에 기대어 있는 그녀의 따뜻하고 실제 하는 몸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무척 비현실적인 꿈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차 위로 후드득 거리며 쏟아지는 빗방울 소리, 나의 심장 소리, 그녀에게서 나는 옅은 시트러스의 향,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손과 조금의 거리감이 없이 밀착되어 있는 우리의 거리.


나는 대학교에 들어가서부터 줄곧 같은 곳에 살았지만 지금껏 단 한 번도 내가 살고 있는 집에 여자를 들인 적이 없었다. 나의 집은 작업실을 겸한 열 평 남짓한 곳으로 침대와 간이 파티션 옆쪽으로는 이젤과 물감이 놓여 있었다. 싱크대에는 먹을 만한 것들이 아무것도 없었다. 방에 틀어 박혀 몇 날 며칠을 보내는 적도 많았지만 최근에는 집에서 무엇인가를 만들어 먹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오피스텔이었지만 커튼을 열면 창 밖으로 대로변의 불빛이 가득 들어와 답답한 느낌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주로 커튼을 치고 사실상 암막 상태로 아무런 빛도 없는 곳에서 작업을 하는 것을 좋아했다.


한 점의 여유도 없어야 해결의 실마리가 떠오른다.


그리고 나의 장소에 그녀가 들어왔다. 나는 그 자체로 무장 해제가 된 느낌이었다. 오늘 아침만 해도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을 일이다.


그녀와 나는 택시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을 누를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마치 이 공간에 없는 듯한 멍한 눈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실제 하는 그녀를 확인하듯이 맞잡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마침내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우리는 커튼이 쳐져 있는 어두운 방에 들어가 껴안은 상태로 다시 한번 입을 맞추었다. 나는 일부러 불을 다 켜지 않았다. 물론 환한 불빛 속의 그녀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동시에 꿈에서 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을 켜는 순간, 이 모든 것은 불현듯 꿈에서 깨어나듯 전부 다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를 안으며  자연스럽게 아무렇게나 놓인 물감과 이젤을 거쳐 침대에 가서 누웠다.


" 저기, 하준아. "


그녀는 침대에 누우면서 말했다.


" 응? "


나는 짧게 대답하면서 그녀의 목에 입을 맞추었다.


" 나는 오랫동안 이런 순간을 기다려왔어. "


그 말은 진심으로 나를 놀라게 했다. 그래서 나는 잠시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은 어둠에 가려있었지만 흔들리지 않는 고요한 바다를 연상케 했다.


" 나는 오래전부터 너가 나한테 키스를 하고 안아주는 상상을 했어. 하지만 용기가 없어서 내가 먼저 너에게 다가갈 수는 없었지. 그래서 오늘은... 정말 기뻤어. "


그리고 그녀는 두 팔을 들어 내 목을 감싸고 나에게 길게 키스를 했다. 그녀의 입술이 나의 입술에 닿자, 나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나의 인생에서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믿었던 일이 지금 눈앞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를 으스러지듯 꼭 껴안았고,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행위를 하는 오래된 연인들처럼 함께 긴 밤을 보냈다. 그리고 그 밤은 빛을 허락하지 않기 위해 닫힌 커튼만큼이나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완전한 우리 둘만의 세계였다. 나는 오로지 그녀와 함께 있는 그 공간에만 존재했고, 더 이상 어떤 것도 필요치 않았다.




딱 한번 그녀는 오래도록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달빛으로 비치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가슴까지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머리를 괴고 상체를 조금 일으켜 내 어깨를 천천히 여러 번 쓰다듬었다. 그리고 내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면서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다.


" 하준아, 너는 날 얼마나 사랑해? "


나는 그 순간 그녀가, 나의 넘치는 마음을 그녀에게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불안해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최대한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 나는 너를 정말로 많이 사랑해. 내가 이렇게 널 좋아하는 것이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말이야. "


그리고 나는 그녀의 머리에 짧게 입맞춤을 했다.


" 하지만 너는... 지금 집중해야 할 일들이 있잖아. 나와의 미래도 생각하고 있어? 진지하게 말이야. "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집요하게 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어떤 대답을 해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당장 약속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그녀가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끌어안고 천천히 등을 쓰다듬으며 그녀에게 내재되어 있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조금 떠나가기를 기다렸다.


" 나는, 너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할 거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너도 나도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돼. "


그리고 나는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그때의 나로서는 미래라든가,  앞으로의 일들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그녀 또한 날 좋아한다는 것이고 이제야 가까스로 내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물론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녀가 가진 근본적인 불안은 사람에 대하여 그녀가 가지고 있었던 일종의 강박증과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그녀 자신의 껍데기에서 깨어 나오지 못한 상태로 세상을 겉돌았던 것이다.


어쩌면 그녀에게, 삶이란 너무 많은 요구와 결단을 내리는 어려운 장소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수없이  많은 시간을 걸쳐 그날 밤 지그시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검은 눈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하얀 등과 아름다운 가슴과 옅은 시트러스의 향을 기억했다. 그녀가 찾고 있던 그 푸르고  아름다운 세상에 그날과 같이 손을 잡고 언제까지나 둘이 함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 오래도록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밤이,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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