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스리랑카] 뚝뚝 타고 스리랑카 일주, 3,375km / 콜롬보
크리스마스이브 아침. 전날 갈레 페이스 나들이로 쌓인 피로가 풀릴 때까지 늘어져 자고 싶었지만 할 일이 많았다. 먼저 에어비앤비로 예약한 숙소(Colombo House) 앞 작은 마당에 주차한 뚝뚝에 블랙박스를 달았다. 뚝뚝 시가잭에 3구 분배기를 설치해서 블랙박스 2대와 핸드폰 충전까지 동시에 할 수 있게 만들었다. 미리 준비한 강력한 양면테이프가 제 몫을 톡톡히 했다. 뚝뚝은 며칠 동안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조금씩 긴 여행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
네곰보에서 이곳으로 오던 날, 긴장감에 어깨가 굳고 목을 앞으로 쭉 빼고 운전하느라 정신이 없던 나는 숙소를 착각했다. 내비게이션을 잘못 보고 엉뚱한 민가의 대문을 열었다. 그것도 모르고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며 후진해서 뚝뚝을 세웠다. 짐을 내리려는 데 눈을 동그랗게 뜬 중년 부부가 급하게 옷을 걸치고 나왔다.
“콜롬보 하우스 찾아왔죠? 여기가 아니에요. 윗집으로 가세요.”
“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바로 옮길게요. 고맙습니다.”
나는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다행히 그들이 먼저 이 상황을 알아차려서 오해 없이 일이 쉽게 풀렸다. 하지만 뚝뚝을 다시 좁은 골목으로 이동하는 건 쉽지 않았다. 아직 회전각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안한 마음에 조급증이 생기고 손에 땀이 났다.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며 꾸역꾸역 진짜 숙소에 도착했다.
실수는 실수일 뿐, 또 지난 일일 뿐이다. 오늘은 뚝뚝을 타고 마트에 가기로 했다. 카길 푸드 시티(Cargills Food City)는 어지간하면 스리랑카 전역 어디에나 있는 중대형 마트다. 과일, 채소, 각종 생육과 신선한 해산물, 생필품을 모두 갖추고 있어 여행 중 거의 매일 들락거렸다. 뚝뚝을 타고 마트 주차장에 진입하려는 데 시동이 꺼졌다. 마음이 급해서였을까.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당황한 나는 뚝뚝을 밀어서라도 옮기려 했지만, 핸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떤 이유인진 모르지만 락(잠금)이 걸린 것 같았다. 출입구에서 멈춰 버린 뚝뚝에 앉아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럴 때는 꾀를 부려야 한다. 외국인이 뚝뚝을 타고 외진 곳에 나타났으니, 틀림없이 주변 사람들은 아까부터 나를 의식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내가 어떤 곤경에 빠졌는지도 다 알고 있다. 나는 재빨리 주변을 둘러봤다. 마침, 마트 앞에서 손님을 기다리던 뚝뚝 운전사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빙긋 웃었고, 그도 웃었다. 역시 더 설명할 게 없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그는 순식간에 핸들을 풀고 시동을 걸었다. 문제가 해결되는 데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장을 봐서 나오는 데 아직도 운전사는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그를 지나치며 고개를 내밀고 팔을 쭉 뻗어 고맙다고 크게 외쳤다. 그도 어깨를 으쓱했다. 언덕을 넘고 좁은 골목길을 다시 지나 숙소에 돌아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 운전미숙이 문제라고 여겼다. 다 좋아질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황당한 일이 펼쳐질지 이때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장 봐 온 물건을 정리하고 외출 준비를 했다. 네곰보와 콜롬보에서 본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우리나라보다 더 활기차고 뜨거웠다. 오늘은 작정하고 자정까지 크리스마스이브를 즐길 참이다. 밤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팔자 좋은 여행자가 갈 곳은 많다. 지난 여행에서 표시해 둔 콜롬보 명소만 스무 곳이 넘는다. 이 중에서 B만 가보지 않은 곳을 골랐다. 비하라마하데비 공원(Viharamahadevi Park)이다. 공원 주변에는 국립박물관, 공립도서관, 넬럽 푸쿠나 예술극장이 모여 안온한 분위기를 만든다. 공원 앞에 도착하니 크리스마스 축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푸드트럭이 들어서는 것 같았다. 이것저것 맛보고 싶었지만 대부분 영업 준비 중이었다. 그래도 R은 용케 무엇인가를 사서 두 손으로 받치고 다가왔다. 굴랍 자문(Gulab Jamun)이었다. 경단처럼 동글동글하게 생겼는데 설탕물에 뺐다 꺼낸 도넛과 비슷한 맛이다. 향도 거슬리지 않고 달콤해서 더운 날 기력이 읽어갈 때 우황청심원 대용으로 먹기 딱 좋다.
푸드트럭을 지나자 나는 까치발을 하고 건너편을 살폈다. 분명히 여기쯤인데. 나는 한 달 전에 R과 함께 봤던 갤러리를 찾고 있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구글 지도에 길거리 갤러리(Street Art Gallery)라는 표기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하지만 분명 지도에 맞게 찾아왔는데 갤러리는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말 그대로 도로 사정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노천 갤러리였다. 한국에서 운전하다 보면 간혹 고속국도 초입에서 밥상이나 서랍장 등 가구를 전시해 파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그와 비슷했다. 커다란 캔버스가 도롯가에 세워져 있고 나무에 매달리기도 했다. 직접 보니 기대 이상이었다. 하얀색 벽에서 레일 조명의 은은한 메이크업을 받는 진짜 갤러리의 작품처럼 강렬했다. 오히려 바람에 천천히 흔들리는 가로수 잎사귀 사이로 쏟아지는 자연조명과 흑색 보도블록과 어울려 작품과 관람자의 경계 없이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작가가 애써 품격을 갖추지 않아도 이 자리에 옹기종기 펼쳐진 살아있는 도록이 그가 예술가로서 가진 기질과 영혼을 단번에 표현했다.
R과 나는 이곳을 길거리 갤러리라는 이름 대신 드라이브 스루 갤러리라고 불렀다. 이 도로는 콜롬보 동쪽 해안가에서 서쪽으로 가는 가장 크고 반듯한 길이라서 뚝뚝을 탈 때마다 곧잘 이곳을 지났다. 그때마다 우리는 두리번거리면서 작품을 감상했다. 또 승용차를 탄 스리랑카 사람들이 속도를 늦추고 창문을 내려 작품을 감상하고 흥정하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정확한 지점은 상황에 따라 몇십 미터 정도 달라지지만, 구글 지도에 이곳을 등록해 둔 누군가에게 참 고마웠다. 무거운 작품을 이곳까지 날라 보여주는 여러 작가에게도 감사했다. 어쩌면 주변에 있는 공원과 도서관, 박물관, 예술극장이 만든 안온한 분위기의 화룡점정은 드라이브 스루 갤러리가 아닐까. 마음 같아서는 마음에 드는 작품을 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여행이 많이 남았고, 한국으로 가져가기에는 부피가 너무 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의 작품을 또 보는 일, 처음 본 것처럼 감탄하는 일 그리고 이곳에 가보라고 부추기는 것이기에 이렇게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