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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코로나 19 달라진 명절-1

코로나 이전, 기억 속의 나의 명절은?

by 연두씨앗 김세정

올해로 결혼 10년 차...

매해 지독했던 명절이 올해는 뭔가 아쉬울 만큼 가볍다.

어릴 때 설날은 마냥 좋았다.

명절에는 새 옷도 사고, 용돈도 받고,

떡국도 먹고, 갈비도 먹고, 동그랑땡도 원하는 만큼 많이 먹을 수 있으니까

원 없이 먹다 보면 1~2KG 찌는 건 일도 아니었다.


설에는 추석처럼 성묘를 가지도 않았다.

모르는 어른들도 인사만 하면 만 원짜리 한 장, 최소한 오천 원짜리 한 장은 주셨다.

한복을 입고, 친척들과 놀기만 하면 됐다.


내가 어느 정도 자라자 나는 주방으로 불려 들어갔다.

6남매의 장남이었던 아빠에게는 3명의 여동생과 2명의 남동생이 있었으나

삼촌들이 아빠와 나이차가 많아서 엄마는 외며느리 역할을 몇십 년을 해야 했다.

처음엔 그저 맛있는 전과 음식들의 간 보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러다가 깻잎과 배추에 밀가루를 묻히고, 동그랑땡 모양을 동그랗게 빚었다.

처음엔 재미있었다.

그냥 조금 하다가 싫증이 나면 대충대충 만들면 엄마가 눈치채고 그냥 나가서 놀라고 하셨다.

(삼남매 중에는 나만 엄마를 도와줬으므로 엄마는 내가 하다가 도망가더라도 실망하지 않으셨다.)

그때는 음식 장만하는 일은 내 일이 아니었으니까...


아빠를 비롯한 남자 어른들은 밖에서 술을 드셨다.

가끔 운전을 하시는 경우를 빼면 막걸리, 탁주, 소주 같은 주류를 드셨다.

아빠는 추석날 점심부터 저녁까지 빼곡하게 술을 드셨다.

나이가 들자 명절에 술 마시는 어른들의 모습이 보기 싫었다.

나와 엄마와 할머니는 주방에서 설거지하고 음식 준비를 하는데

남자라는 이유로 남동생을 비롯한 남자 어른들은 배부르게 마시고 먹고 이야기하고 TV를 봤다.

"엄마 불공평해!"

초등학생 3~4학년쯤 나는 그것이 불공정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고작 10~11살의 여자아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넌 그럼 시집가지 마."

엄마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자신의 일을 마쳤다.

명절 점심을 먹고 치우고 나면 엄마는 바빠졌다.

나는 오후에 오는 고모와 친척동생들을 보고 싶어 했지만

엄마는 항상 서둘러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하셨다.

아빠는 늘 그렇듯이 추석날 저녁때가 되어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오셨다.

명절이 끝나면 엄마는 화를 내셨다.

명절이 끝나면 아빠는 말이 없으셨다.


내가 어릴 때 우리 부모님 세대는 여성보다는 남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다.

엄마는 내가 크면 여성들도 사회생활도 많이 하고,

지금보다는 훨씬 많은 것들을 누리고 할 수 있을 거라고 하셨다.

전이나 음식 같은 건 비싸긴 하지만 사다가 먹으면 된다고

너는 커서 편하게 살라고 하셨다.


그시절 나는 우리나라의 명절문화가 내가 어른이 되기 전까지 빨리 사라지길 빌었다.

하지만 나는 결혼 전까지 약 20년 간 부엌일을 도와야 했고,

결혼 후 10년 가까이 명절 때 부엌 일에서 해방될 수 없었다.


코로나 전 설날 모습


'왜 사람들은 먹지도 않는 음식을 저렇게 쌓아놓을까'


예전에 비해 음식의 양도 종류도 많이 줄었지만

명절에 며느리와 시어머니만 주방에 있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결혼 초에는 남편도 함께 송편도 만들고 전도 부쳤다.

하지만 아이가 생기면서 누군가 아이를 봐야 했고, 점점 주방에서 멀어졌다.

시어머니도 남편이 음식을 도와주는 것을 썩 반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언제부턴가 도와주는 것보다 눈치 보는 일이 많아졌고

음식의 양이 줄어들면서 남편은 아예 주방 밖으로 밀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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