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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씨앗 Nov 12. 2021

낯선 아줌마에게 느낀 호감의 신호

비 오는 날, 우산을 함께 쓰는 일....

나는 '금사빠'다.

나는 사람을 보면 첫 느낌을 가장 중요시한다.

첫 느낌이 좋다면 두 번째 느낌도 대부분 좋았다.

내가 처음에 좋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지내다 보면 안 좋은 경우도 간혹 있었지만

그래도 대부분 좋은 사람들이었다.

어느 누군가는 그걸 '결'이 맞는다고 했다.

암튼 나는 누가 나를 좋아하는 지도 중요하지만, 내가 누구를 좋아하는 지를 중요시한다.

나이가 들면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고 말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그 전에는 '좋아한다.'는 말이 너무 어려웠는데 생각해보니 좋아한다는 게 이성 간의 감정은 아니었다.

나는 좋아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저녁 늦게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 낮에 OO엄마 만났다며, 너한테 고맙다고 전해 달래."

 "아, 그거?"

 언니의 말에 낮에 있었던 일이 불현듯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오후 시간, 친정엄마를 대신해 조카를 인라인 수업 차량 타는 곳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다.

언니가 내가 사는 동네로 이사 오면서 나는 나의 아이들 2명과 조카 2명의 보육의 일이 더해졌다.

엄마가 아닌 이 모이기에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종종 친정엄마가 바쁘거나 언니가 바쁠 때 이모 SOS를 보냈다.

 언니가 이사 오기 전에는 서로 사는 곳이 너무 멀어 신경 써주지도 못했고, 비슷한 또래의 딸들을 키워야 하다 보니 내 자식 보느라 조카들을 잘 챙겨주지 못했었다.


 몇 번 동네에서 얼굴을 마주쳐서 인지 조카의 같은 반 엄마들이 나를 보고 인사를 했다.

그녀들은 다수이고, 나는 혼자이기에 나는 그녀들의 얼굴을 모두 기억할 수 없었다.


 나는 그녀들에게 'OO이 이모'였다. 사람 얼굴을 비교적 잘 기억하는 나였지만 도무지 조카의 친구들 엄마들까지 기억하기는 버거웠다. 하지만 'OO이네 이모'라며 인사해주고 반가워해주는 통에 도무지 기억을 안 하고 싶어도 종종 얼굴이 떠오를 때가 있었다.

  아마 내 아이의 친구 엄마였으면 여기저기 껴서 수다도 떨고 할 테지만 나는 이모라서 그 대화에 끼기도 어색하고 불편했다.


 오늘따라 하늘이 오락가락하더니 비가 왔다 멈췄다를 반복했다. 조카를 데리고 성인 3명은 거뜬히 들어가는 대형우산을 가지고 나와 조카를 배웅했다.

 조카가 다니는 인라인 차량 버스가 도착하기 전에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했다. 한 아이가 도착하지 않아, 버스는 대기 중이었고 그 앞에 대기 중인 엄마들도 함께 대기를 해야 했다.

 빗방울이 두꺼워지자, 나는 본능적으로 아이들에게 인사를 하는 낯선 어머니에게 다가가 우산을 받쳐 들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떨어지던 빗방울이 멈춘 것을 느꼈는지 위를 올려 우산을 한 번 보더니 고개를 쓱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 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내게 고맙다고 연신 인사를 했다. 차량이 출발하자 그녀가 말했다.

 "저는 저기 정자에서 기다리다가 신호가 바뀌면 건너가면 돼요. 우산 받쳐주셔서 감사해요. 바쁘신데 먼저 가보셔도 돼요. 감사합니다."


 그녀는 횡단보도 건너편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아, 그럼 파란불 바뀌면 지하주차장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비도 많이 오고, 지하주차장도 코 앞이고요."

 "아니에요. 바쁜 신데 괜찮습니다."

 "아.. 바쁜 일은 없어서요. 이 횡단보도만 건너면 되는데요. 괜찮습니다."

 

 낯선 아이 엄마와 나는 우산 속에서 서로에 대한 호감을 쌓아가고 있었다.

 내가 결혼을 안 한 상태였고, 그녀가 아니라 '그'였다면 짧은 뮤직비디오 정도 분량은 나왔을 만한 훈훈한 분위기였다.

 

 그때 우리의 훈훈한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엄마가 물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즐겁게 하세요?"

 "아, OO이 이모님께서 제가 우산을 안 가지고 왔다고 하니까 길 건너까지 데려다주신다고 해서요."

 "OO엄마, 우산 없어요? 그럼 이거라도 쓰세요. 저녁에 아이들 올 때 가져다주면 되죠."

 "아.. 그래도 돼요? 그럼 우산 좀 빌릴게요."

 

  아이 어머니께서는 내 우산에서 나와 파란색 아이 우산으로 갈아타셨다.

 비로소 할 일이 없어진 나는 무리에서 빠져나와 인사를 한 뒤 그 자리를 떠났다.

 엄마들이 모여있던 뒤쪽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아, 고마워서 길 건너서 커피라도 한 잔 대접하려고 했었는데...."


 멀리서 오직 그녀의 목소리만 또렷하게 들렸다.

 '아, 우산이 뭐라고 그 사이에 커피 생각까지 한 건가.'

  그 말 한마디가 가슴속에서 콕콕 찔러댔다.


 사실, 나는 그분을 잘 모른다. 초면은 아니지만, 초면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나에게는 낯설었다.

아무리 같은 동네에 사는 이모라고 해도 조카의 친구들 엄마들까지 다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 오는 날, 비 맞는 것을 극도록 싫어하는 나는 나뿐 아니라, 남이 비 맞는 것도 싫어한다.

 요즘은 사회에 뒤숭숭해서 낯선 사람 우산 받쳐주는 일은 잘 안 하고 있지만

오랜만에 우산으로 훈훈한 정(?)을 느낄 수 있었던 하루였다.


  저녁시간, 언니와의 통화로 낮의 훈훈함이 한 번 더 전해졌다.

 "그 엄마가 너한테 고맙다고 전해 달래."

 "아... 그분 되게 좋아 보이더라."

 "응, 그 엄마 성격도 좋고, 애도 착해."


'동네 아줌마끼리 비 오는 날 우산 씌워주기...'

 그녀와 나의 스토리는 딱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첫눈에 반한다'는 게 혹시 이런 느낌은 아닐까?

 이제 그녀의 얼굴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멀리서 던진 '커피'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상대방을 보고 반짝이는 눈동자

 그리고 그 사람이 했던 말을 곱씹는 것.


내가 만약 '강동원'정도의 비주얼이었다면

어떤 누군가의 마음을 훔쳤을지도 모른다고 혼자 생각하며 웃었다.



<덧붙이는 말>


영화 '늑대의 유혹'이 처음 영화관에서 상영되었을 때

강동원이 우산 속에서 짠 하고 나왔을 때 안 반한 여학생들이 있었을까?

사람 뒤에 빛나는 빛, '후광'이라는 것을 영화를 보고 제대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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