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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 소설] 소울메이트 (이별 독감_2)

by 연두씨앗 김세정

-2-

'좋은 사람...'


유정은 연애 시작 전부터 습관적으로 이별을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유정은 그것이 연애에서 있어 덜 상처받는 법이고, 그것이 상처에서 빨리 헤어 나올 수 있는 비법이라 여겼다.

그런 유정의 잘못된 사고를 깨 주었던 사람이 있었다.

유정은 곰곰이 생각에 잠겨본다.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해졌지만 여렴 풋이 떠오르는 그 사람의 이미지.

연갈색의 깊고 맑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 길게 늘어진 속눈썹이 꼭 낙타나 소의 눈 같다며 유정은 정우를 놀려댔다. 그럴수록 정우는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정을 바라보곤 했다. 정우의 표정을 보며 유정은 더욱 깔깔거리며 웃었다.


오랜 짝사랑에 지쳐있던 유정에게 정우는 편안한 쉼터 같은 존재였다.

유정에게 정우를 소개하여준 사람은 회사 선배 선예였다. 선예는 정우를 '좋은 사람'이니 한 번 만나보라며 유정에게 정우를 소개시켜줬다. 유정은 소개팅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요즘 들어 짝사랑에 우울해하던 유정을 걱정하던 직장 동료들은 유정과 정우의 소개팅을 등 떠밀듯이 준비해나갔다.

"유정아, 세상에서 제일 예쁘게 하고 나와, 알았지? 내가 우리 쌤 중에 제일 초미녀라고 소개해놨거든. 알았지? 꼭 꼭이야 약속!"

유정은 옷장을 뒤져 가장 좋아하는 옷, 좋아하는 액세서리,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향수를 뿌리고 소개팅 장소로 나갔다.

선예와 정우, 그리고 선예의 남자 친구가 유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우는 유정을 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유정을 향해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노정우입니다.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정유정입니다."


선예와 선예의 남자 친구가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비워주었다.

유정은 첫 만남에도 불구하고 말이 잘 통하는 정우가 싫지 않았다. 선예의 말대로 정우는 꽤 좋은 사람 같았다.

정우는 유정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 유정의 말 하나하나에 눈과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왜요? 제가 웃겨요?"

한참 이야기를 하던 중에 유정은 자신을 보며 피식피식 웃는 정우를 향해 물었다.

"아니에요.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그냥 유정 씨는 참 밝고 유쾌한 사람 같아서요. 그냥 톡톡 튀는 탱탱볼 같은 느낌이에요."

유정은 정우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다. 유정은 정말 밝고 유쾌한 사람이기도 했으니까.


두 사람은 오랫동안 진지한 대화를 했고, 12시가 넘어서야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정우는 유정이 타고 갈 택시를 직접 잡고, 거리만큼의 택시비를 기사에게 지불했다.

"괜찮아요. 저 돈 있어요."

"다음에 만나면 대신 밥 사주세요. 그럼 되죠?"

정우의 에프터신청이 유정은 싫지 않았다.

"조심히 잘 들어가고, 담에 만나서 더 얘기해요. 오늘 덕분에 정말 즐거웠어요."

택시 문을 닫고는 정우는 유정에게 잘 가라며 손짓했다.

'어쩌면 그간 나를 힘들게 했던 지겨운 짝사랑을 끝낼 수 있지 않을까?'

유정은 환하게 웃고 있는 정우를 보며 문득 그런 생각했다.


다음날 유정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점심시간에도 틈틈이 혹시 정우에게 연락이 왔는지 메세지함을 열어 확인을 했다.

아침이 아니라면 점심, 적어도 퇴근 전까지는 정우에게서 연락이 올 거라 생각했었다.

"어제 분위기 좋던데? 잘 만났어?"

유정은 선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몇 시에 헤어졌어?"

"12시 좀 넘어서요..."

"우와~ 분위기 좋았나 보네.. 그럼 에프터는? 맘에 들어? 어때?"

유정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선예의 질문 세례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선예는 환호를 질렀지만 유정의 표정은 조금 어두워졌다.

"근데, 선배 그 사람은 제가 맘에 안들 수가 있죠. 애프터는 너무 신경 쓰지는 마세요. 선배 덕분에 기분 전환은 됐어요."

"그런 게 어디 있어? 우리 유정이 같은 여자가 어디 있다고!! 애프터 안 왔어?? 이상하네 내가 경수 씨한테 확인해봐야겠네. 여기 있어봐~"

선예는 유정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전화기를 들고 사라져 버렸다.

유정은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제의 분위기만 봐서는 오늘 당장 연락이 올 줄 알았다. 그런데 정작 그렇지는 않았다. 유정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 뒤로도 선예는 종종 유정을 찾아와 애프터 신청을 받았느냐고 재차 캐물었다. 유정은 선예에게 이제 장난은 그만치라며 웃으며 말했지만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다. 선예는 그때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점심시간이 되자, 기다렸다는 듯 선예는 유정을 찾아왔다.

"유정아, 정말 연락 안 왔어? 그 날 분위기 좋았잖아. 내가 경수 씨한테 물어봤는데... 그 친구도 너 마음에 든다고 했다던데... 왜 연락이 없지?"

소개팅을 한 지 일주일이 지나고서도 선예는 포기할 줄 몰랐다. (선예는 생각보다 포기를 모르는 여자였다.)

"그냥 예의상 한 말일 수도 있으니 신경 쓰지 마요, 선배. 나 그거 말고도 신경 써야 할 일들이 엄청 많다니까요!"

"아냐. 이 좋은 나이에 연애 말고 뭣이 더 중요해. 내가 경수 씨한테 다른 사람 알아보라고 할까? 그 사람 별로였지? 별로지? 새로운 사람 알아볼까?"

"선배! 거기까지... 이제 그만.."

유정은 여전히 소개팅에 집착하는 선예가 불편해졌다. 남자친구 경수에게 또 다시 전화하려는 선예를 유정이 잡아끌었다.

"선배 부탁이에요! 이 시간 이후부터는 그 소개팅 건에 대해서는 제발 묻지마세요. 시간도 지났고, 그런 일에 저나 선배나 시간 낭비하는 것 같아요."

"알았어. 예민하게 굴긴..."

유정은 다른 소개팅에 대해서까지도 앞으로는 일절 묻지 않기로 약속을 하고서야 선예를 풀어주었다.


사람들은 '새 것'을 참 좋아한다. 새 집, 새 옷, 새 차, 새 친구 등 새로운 것들에 환호한다.

그래서 일까? 매 년 새 해가, 또 새 학기가 되면 새로운 계획을 짜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 출발을 시작한다.

다른 곳들이 그러하듯이 매년 새 학기가 시작하고 나면 유정의 학원 수강생들도 바짝 늘어난다. 많아진 수강생들만큼 유정의 일과는 바빠졌지만 그외에 유정의 일과는 변함이 없었다. 유정에게는 그저 봄이 왔고, 그로 인해 해가 뜨는 시간이 좀 길어져 아침일찍부터 마음껏 일광욕을 할 수 있다는 점만이 달라졌다.

점심을 먹은 뒤 유정은 커피숍에 들려 평소에 즐겨 먹던 달달한 카라멜마끼야또를 주문했다. 달달한 커피 한 모금 넘긴 유정은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유정이 다시 학원으로 돌아가려 커피숍 문을 막 나섰다. 그때였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낯선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유정은 직감적으로 매우 불편하고 모호한 감정을 느꼈다.

유정의 예상대로 핸드폰에는 낯선 번호 하나가 찍혔다. 유정의 머리에 '혹시?'라는 글자가 스쳐 지나갔다.

유정은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문자확인을 누를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문자의 알람 소리 이후, 유정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유정은 낯선 번호의 문자가 무슨 내용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확인하기 두려웠다.

유정은 그 문자가 정우에게 온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설마.... 아니겠지.'


정우와 유정이 소개팅한 지 벌써 3주가 지났다.

유정은 그 문자의 주인이 정우가 아닐거라 생각하면서도 정우가 맞을 거란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왜?'

유정은 문득 정우가 3주 만에 무슨 얘기를 할지 궁금했었다.

하지만 2주가 넘게 선배에게 소개팅 때문에 시달린 거, 자신을 헛된 희망에 들뜨게 만들었던 정우가 원망스러웠었다.


유정은 문자를 확인하지 않은 채 하루 일과를 하나 둘 정리했다. 퇴근시간이 다가와서야 유정에게는 조금의 여유가 생겼다. 유정은 문자를 누를까 말까 한참을 고민했다.

'지금 연락 온 이유가 뭘까? 그 사이에 소개팅을 더하다가 마음에 안 들었나?? 뭐 정말 갑자기 돈이 필요한데 나한테 빌리려고?? 그건 아니겠지, 내가 아는 사람도 아닌데 왜 나한테 돈을 빌려? 내가 돈이 많아 보이지도 않을 텐데... 뭐야 이 사람, 기분 나쁘게.'

유정은 말도 안되는 상상부터 최악의 상황까지 머리 속에 그려나갔다.

초반의 부푼 기대만큼 실망도 컸기에 유정은 정우의 연락이 달갑지기만 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정우의 연락을 기다렸던 만큼이나 문자의 내용도 정말 궁금했다. 유정은 일단 문자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메세지함을 열었다.



-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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