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부모는 원래 없다.
'어머니, 아버지.'
가만 불러만 봐도 따뜻해지고 그리워지는 이름이다.
내가 걸어가다 넘어지면 바로 일으켜 주고, 내가 걸어가다 넘어지면 바로 일으켜 주고, 세상의 좋은 것들은 다 나에게 주고 싶어 하고, 나를 위해 고된 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언제나 나를 최고라고 말해 주고, 억울한 일이 생기면 나를 대신해서 싸워 주는 세상 든든한 이름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렇게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이상화하고 그리워하면서 성장한다.
그러나 현실의 부모는 그리 완벽하지 않으며 내가 원하는 만큼의 사랑을 주지 않을 때도 많다.
(중략)
하지만 우리는 부모가 되어 보지 않고서는 부모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사랑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모를 원망하거나 내가 부모가 되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한다.
상상 속의 완벽한 부모가 되기를 꿈꾸는 것이다.
<만일 내가 세상을 다시 산다면, 김혜남 지음> 중에서...
책을 읽다가 흠칫 놀랐다. 그렇다. 내가 엄마에게 서운하고, 아빠에게 화가 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이상적인 부모'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
어린 시절, 늘 최선을 다해 사는 엄마에게 더 이상 사랑을 갈구하지 않았고, 부인의 말도 안 듣고 자식들을 늘 훈계하고 혼내는 아빠에게 대화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자기 일이 우선인 언니는 늘 바빴고, 챙겨주고 싶었던 말썽쟁이 남동생은 아무리 말을 해도 누나의 말은 잘 듣지 않았다. 가족 안에서 나는 나 스스로 '포기'해버렸던 것 같다.
배가 고픈 것도, 몸이 아픈 것도 아닌데 마음이 늘 허전했던 이유였던 것 같다. 사람에게 집착하고, 귀여운 동물을 쓰다듬으며 그들이 보내는 온전한 사랑(?)을 갈망했던 것 같다.
'나는 나중에 저러지 말아야지, 나는 저렇게 안 할 거야. 나중에 커서 두고 보자.'
속으로 부모를 원망하고, 나는 더 좋은 부모가 되겠다고 다짐했었다.
좋은 부모이고 싶었지만, 정말 힘들다는 것을 막상 '부모'가 되어보니 알 것 같다.
어린 시절 뭐든 잘하고 뭐든 잘 아는 슈퍼우먼(?)이었던 엄마와 달리 나는 초라한 엄마였다.
부족한 것도 모르는 것도 서툰 것도 많은 데다 게으르고, 겁도 많았다.
'처음이라... 아직 모르는 게 많다'라고 변명했던 초보엄마도 지나고 이제는 제법 아이들이 자랐는데도 나는 여전히 부족한 게 많다.
아이들에게는 필요한 것이 많은데 나는 그걸 다 해줄 수 없어서 늘 괴로웠다. 어린 시절 나의 엄마처럼 슈퍼맨(?)이 된 남편의 도움으로 육아를 하며 근근이 버텼던 것 같다.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100%는 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을 해주고 싶었다. 어린 시절 내가 받아보지 않았던 사랑과 풍족한 가족의 사랑을 다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건 어쩌면 과한 욕심이었던 것 같다. 해주는 것이 많을수록 아이에게 바라는 것도 많아졌다.
'많이 바라는 것도 아니야. 그냥 보통.. 아니 중간만이라도.. 아니 중간이 안되면 그래도 하는 시늉정도는 해야지.'
아이가 처음으로 수영을 배우기 시작을 했을 때였다. 몇 달이 지나도 실력은 좋아지지 않았다. 다들 아직 때가 아니라며 기다리라고 했지만 나는 척척 앞으로 헤엄쳐나가는 아이들을 보곤 부러워했다.
'나는 왜 이렇게 늘 기다려야 할까? 우리 딸도 그냥 다른 아이들처럼 같이 출발하면 안 되는 걸까?'
아이의 속도는 생각도 안 하고 난 늘 조급했다. 그러다가 아이가 넘어지고서야 후회를 했다.
'괜히 뛰라고 했네. 그냥 걸어가게 놔둘걸. 그냥 걸어갔으면 넘어지지 않았을 테고, 넘어지지 않았으면 뛰지 않아도 지금쯤 도착했을 텐데...'
살아보니 내가 아이를 도와주기 위해 한 조언이나 충고들이 아직 아이들에게도 버거울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늘 반성하고 공부를 해봐도 어렵다.
아이가 어린 시절에 나는 진정한 모성(?)을 배우고자 아이에게 나를 갉아넣은 적이 있었다.
24시간 나를 버리고 내가 모시는 아이(?)에게 집중했다. 불편한 것은 없는지 부족한 것은 없는지 아이만 보고 관찰했고, 울음소리, 눈빛만으로 아이와 교감하기에 이르렀다.
벅찬 설렘과 달리 새로운 벽이 생겼다. 바로 '발달'이었다. 기어야 할 때 기지 않았고, 말해야 하는 데 말하지 않았다. 태어나길 12월이라는 가장 늦은 달에 태어났기에 아이가 발달이 빠를 거라 기대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태어난 다른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왜 우리 '아이'만 늦는 걸까? 고민했던 것 같다.
"내가 어릴 때, 다 느렸다는데... 우리 딸은 날 닮았나 봐. 여보처럼 빠른 사람이면 좋을 텐데..."
아이의 문제점이 나에게 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늘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 절정은 아이가 30개월이 된 어느 날이었던 거 같다. 느린 언어 발달에 초조했던 나는 결국 '발달 상담센터'를 찾아가게 됐다.
처음 질문지를 읽으면서 당황스러웠다. 모두 '아니요'를 선택했다. 질문지에서는 내가 가장 피하고 싶던 가정의 모습이 나왔다.
'저는 아이를 때린 적 없어요, 혼자 방치한 적도 없어요, 아이의 요구를 무시한 적도 없어요. 아이를 두려운 상황에 내버려 둔 적도 없어요.'
나는 아이에게 최선을 다해서 잘해줬는데 왜 우리 아이가 느린 걸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혼자 울게 방치하지도 않았고, 아이 앞에서 큰 소리내거나 싸운 적도 없고, 아이에게 필요한 환경을 제공하려 늘 노력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착하고 성실하게 열심히 살았는데, 아이에게도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원망스러웠다.
상담을 하면서 자기 세계(?)가 조금 있긴 하지만 당장 치료할 정도는 아니고, 말은 느리지만 '지능'에는 문제가 없다는 얘기를 듣고 안도했다. '내가 너무 성급했던 걸까?'
아이를 안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 다시 천천히 한 글자씩 책을 읽어주고, 아이가 다 말할 때까지 기다려주고, 아이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하나둘씩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이가 말을 하지 않은 이유, 그리고 아이가 말이 느린 이유는 엄마인 나 때문이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다 알아듣는 엄마'가 있기 때문에 아이는 굳이 수고스럽게 말을 하지 않아도 됐다. 필요한 게 없고, 말을 하지 않아도 의사소통이 되니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과유불급'을 이렇게 육아를 하며 깨닫게 되었다.
늘 마음이 급한 나는 아이를 기다려주지 못했고, 너무 잘하기를 기대하는 나에게 아이는 자신이 없었던 것 같았다. 어설프면 어설픈 발음대로 대화를 하면서 아이와 소통하기 시작했다. 아이도 한 계단, 나도 한 계단 성장했던 시기였다.
어릴 때 나는 늦된 아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말도 느렸고, 행동도 늘 느렸다고 했다. 물론 성인 되어서도 많이 바뀌지는 않았다. 나는 말보다는 생각이 많고, 생각하느라 몸이 늘 느리다. 느린 엄마는 내 아이만은 '보통 아이'처럼 살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1등은 아니더라도 꼴등은 하지 말자'로 늘 아이를 데리고 뛰었던 것 같다.
최선을 다해 주고 싶었던 것이 독이 된 순간이었다. 그래서 '릴랙스'를 외치며 속도를 조절하는데 아이를 키우다 보면 또 어느 세 아이의 속도보다 과속(?)을 하고 있을 때가 많다.
좋은 부모는 아이가 필요한 것을 항상 충족시켜 주는 게 아니라 적당한 결핍과 좌절로 아이를 성장시키는 부모라고 한다. 아직 나는 좋은 부모가 아니라, 아이에게 매달린 엄마 같다.
아이에게 해주는 게 많을수록 어린 시절 겪었던 나의 아픔과 서러움(?)들이 조금씩 해소되는 것이 느껴진다. 아이를 키우며 어릴 적 외로움을 치료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는 나를 점점 엄마로 성장시키려 오늘도 나를 애태운다.
말 안 듣는 딸을 보면서 다시금 생각해 본다.
'나는 좋은 딸이었나?'
그때의 나는 최선을 다했다. 최고의 딸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살았으니 내 부모님도 나에게 최선을 다해주셨으면 바랬던 것 같다. 그런데 오늘 책을 읽다 보니 내 이상이 너무 어이없이 크고 높았던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자신을 희생하던 부모님, 자식을 늘 사랑하시는 부모님만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부모로 살아보니 자식을 사랑하는 것도 먹고사는 것이 해결돼야 가능한 일이었다.
'좋은 사람' '좋은 부모'가 되고 싶었던 나에게 책은 내려놓고 좀 쉬어가라 말한다. 내려놓고 쉬라는 말은 그 '좋은'에 해당되는 '욕심'도 포함된 것 같다.
완벽한 사람은 없고, 완벽한 삶은 없다.
그냥 내가 사는 삶에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도 버겁다.
책을 읽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