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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노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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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shine May 31. 2022

내 편

노산일기

친정집에 가 있는 동안 아빠가 등기 하나를 주섬주섬 꺼내셨다.


“70년대 땅을 샀다. 허허벌판에 기계 돌린다고 그 동네에 전봇대를 150대를 세우고 벌었던 돈 다 투자해서 광산사업을 시작했다. 근데 나오라는 금은 안나오고 지하수가 터져버렸다. 그렇게 부도가 났고 한전 체납금 300만원을 못 내서 81년에 근저당설정이 됐다. 한전에 물어보니 이제는 체납금액이 없다는데 근저당설정 말소시켜 달라는 건 어디에 물어야 되는지 모르겠네.”


너무 아픈 기억이 있었던 곳인데다 왕래가 쉽지 않은 시골이라 그동안 잊고 살았는데, 생각난김에 그냥 빨리 처리해 버리고 싶다고 하셨다.


나도 참 나이 먹은 것에 비해 아는 것이 없어서 은행에서 일하는 친구 통해 법무사에 문의했고, 한전과 통화해서 이래저래 말소를 시켰다.


근저당 건은 정리를 했고 이제 매매를 알아봐야 하는데, 지역 부동산에 문의하니 한 곳은 농사를 짓고 있고 다른 한 곳은 옆 지역 건물이 아빠 땅에까지 침범해서 건물을 세웠으니 매매 전에 정리를 하라고 한다.


매매 가능한 수준으로 알려준 가격은 서울 땅값에 익숙해 있는 나에겐 참 터무니 없는 싼 가격이었다.

그런데도 워낙 오래 내깔려두었던 땅이다보니 땅주인이 아니라도 20년 이상 거주하면 거주자에게 소유권이 돌아간다는 내용을 어디선가 읽은 것 같아 내심 걱정이 되었다.


농사짓는 사람과 건물을 세운 사람의 연락처는 어떻게 알 것이며 그냥 다짜고짜 전화를 하면 되는건지. 또 불편한 소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이것저것 알아보다 보니 아휴 아빠가 처리할 일을 왜 나한테 넘겨가지고 라는 생각도 들고, 아빠가 떠날 준비를 하시는 것 같아 아무 것도 하기 싫어지기도 했다. 집안에 법조인과 의사는 꼭 있어야 한다더니 형제도 없고 이런 걸 물어볼 편한 친척도 없다.


그러다 네이버 지식인 expert를 찾았다. 예전에도 전셋집 집주인과의 문제로 도움을 받은 기억이 있어 동일한 변호사분을 찾아 이런 저런 문의를 했다. 다행히 악의의 무단점유로 땅을 찾는데 문제가 없을 거라고 했고 그 전에 확인, 조치해야 할 내용들을 일러주었다.


아직 일을 정리해 나가는 과정에 있지만 그 와중에도 참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다 싶었다. 인터넷에 모든 정보가 있다. 살아가는데 맞닥뜨리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 소액의 비용이나 조금의 에너지를 들이면 해결책이나 조언을 얻을 수 있다.

오프라인 세계에서 맺어지는 인연의 끈에 비해 너무나 가느다란, 언제든 바로 끊어질 수 있는 끈들이겠지만, 그 끈 하나하나가 거미줄처럼 엮여 삶을 좀 더 편하게 지탱해 준다. 얼마나 이상적인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세상에 무서운 것 없었던 나였는데, 어느 순간부터 정말 두려움이 많아졌다. 내가 참 모지란 인간이라는 걸 인지하기 시작한 것을 시작으로, 부모님이 계시지 않을 어느 날 허허벌판에 홀로 잘 서 있을 수 있을까 , 남한테 손 잘 못벌리는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까, 부모님이 나를 메꿔준 것만큼 누군가 나를 사랑해 줄 수 있을까 라는 걱정들.


결혼을 기점으로 처음으로 기댈 사람이 생겼다. 남편은 남의 편이라는데, 가끔은 그래도 내 편일 때도 있을꺼다. 다른 남자에게 보내려고 키우는 딸도 그 전까진 내 편이 되어 주겠지.


앞으로 감당해야 할 일들이 더 많을 것을 안다. 그 과정에 내 소중한 가족들이 나를 지탱해 줄 것이고, 이름 모를 온라인 친구들이 도움을 줄 것이다. 못나지 않게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너무 더워지기 전에 남편과 시골길 임장 드라이브 한 번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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