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리 젤리 고고

태아는 머리부터 발 끝까지의 길이가 23밀리미터까지 자라났다

by moonshot

8주 차 검진 날이 다가왔다. 중요한 날이다. 지난 검진 때 보통의 태아보다 심장 박동 수가 낮았기 때문에, 이번에 추세 전환을 확인하지 못하면 자칫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겪게 될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진료실 앞에서 내내 말없이 아내의 손만 잡고 있었다. 침묵 가운데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생전 느껴 본 적 없는 기대감과 비장함이 뒤범벅됐다.


의사와 아내가 진료실 커튼 뒤로 사라지고 휑한 공간에서 창 너머를 내다봤다. 늦봄의 햇살은 자애로웠고 행인들은 그 속을 경쾌하게 움직였다.


“삑~삑~쿵쾅쿵쾅, 삑~삑~쿵쾅쿵쾅쿵쾅”.


초음파 진단기가 태아를 감지하고 심장 박동을 감지했다. 짧은 순간 입이 바싹 말랐다. 어림짐작으로는 지난번보다 강하고 잦아진 소리로 들린다.


“분당 168회 정도로 올라왔네요. 다행이에요”.


커튼 밖으로 나선 의사 선생님의 말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아내도 나도 거의 눈물이 날 정도였지만 입은 배시시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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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닦는 심정으로 한 주간 술을 입에 대지 않았는데, 이날 저녁엔 한잔 하고 싶었다. 20분 거리에 사는 친한 동생을 불렀다. 밤늦게 택시를 타고 넘어온 녀석과 근황을 나누다가 조심스레 임신 소식을 알렸다. 가족들도 일부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입이 근질거려 참을 수 없었다. 아직은 초기이니 다른 지인들에겐 얘기하지 말아 달라는 당부를 했고, 몇 차례 건배를 하며 기쁨을 나눴다.


한차례 안심을 하게 되니 미뤄 뒀던 태명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별을 모르니 중성적이어야 하고, 태중에 있을 때나 나왔을 때나 변함없이 건강했으면 하는 바람을 담고 싶었다. 생각해 둔 것이 전혀 없다 보니 두 가지 조건 만으로도 머리가 아파 왔다. 아내와 촌스러운 이름 몇 가지를 주고받다가 창 밖의 장면에 즉흥적으로 반응했다.


“한강이 어때?”.


내뱉고 보니 두 조건에 적당히 부합하고, 지난 오랜 시간 동안 도도 하게 흘러 왔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맨부커상 수상자의 이름 아니던가. 몇 달 뒤면 쓰지 않을 이름이기에 더 고민하지 않고 ‘한강’으로 낙찰!


9주 차 검진에서는 심박수가 분당 178회까지 올라 붙었다. 성인 심박수의 두 배 수준이자 그 시기 태아의 표준. 안심이 되니 엉뚱한 상상이 꼬리를 물었다.


만약 이 심박수가 어른의 표준이라면 분당 혈액 공급량이 두 배가 되는 거고, 운동 능력이 엄청나겠구나. 근력과 폐활량이 비례해서 좋아지지 않으면 무용지물일까? 마라토너들은 심장이 천천히 뛰는 편이 좋다던데, 순간적인 힘을 뿜어내는 운동에 더 적합해지는 상황인 걸까?


쓸데없는 상상을 할 만큼 여유를 되찾은 상황 속에서 태아는 머리부터 발 끝까지의 길이가 23밀리미터까지 자라났다. 곰 모양 젤리 같은 형체도 초음파 사진 속에 나타났다. 한 인간을 더 책임져야 한다는 생생한 느낌이 전해졌다.


그간 임신 소식을 모르고 있던 양가 가족들에게도 완전히 공개했다. 결혼 만 6년 1개월 되던 시점이다. 운전을 하며 90년대 노래를 담아 둔 폴더를 재생시켰다. 이승환의 ‘제리 제리 고고’가 나왔는데, 내 귀엔 ‘젤리(곰) 젤리(곰) 고고’로 들렸다. 음악따라 기운이 쭉쭉 뻗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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