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큰 일 난 게 아니’라는 사실은 위로의 표준인 것 같다
임신 16주 무렵, 시험관 시술을 했던 병원에서 떠날 때가 됐다. 분만을 하지 않는 병원에서는 이 무렵 주치의가 소견서를 써 주는데, 그걸 들고 출산에 이르기까지 진료해 줄 곳으로 옮기면 된단다.
첫 병원 ‘졸업’을 앞두고 태아 신경관 결손 등 몇 가지 검사를 했다. 이 무렵이면 초음파를 통해 태아의 성별을 알 수 있지만, 훨씬 나중인 7개월 무렵에야 알려 주는 것이 원칙이란다. 궁금해하는 아내를 위해 동료들이 꾀를 냈다. 초음파 동영상을 종합병원 방사선과에 근무하는 지인에게 보낸 것. 몇 분 만에 “버섯 같은 것이 보인다”는 답변이 날아왔다. 초음파 기기와 데이터 전송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꼼수 진단을 해내고 보니 어쩐지 허무하기도 했다. 성별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마음이었지만, 젊은 층의 딸 선호 추세가 강한 요즘이다 보니 ‘약간의 걱정’을 곁들인 축하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17주 차가 되자 아내는 ‘작은 새가 뱃속에서 푸드덕 대는 것 같은’ 태동이 느껴진다고 했다. 살며시 귀를 대 보니 어릴 적 냇가에서 피라미를 잡았을 때와 같은 잔 진동이 울렸다. 초음파 진단기를 타고 넘어온 심장 소리와 그래프가 생명 활동의 증거를 들이미는 것 같았다면, 태동은 마치 정식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다.
'아비, 각오는 돼 있는건가?'
이 무렵 기사 하나를 읽었는데, 책임져야 할 생명체와 정식 인사를 한 터라 무겁게 다가왔다. 결혼과 출산 연령대가 높아지다 보니 ‘늙은 부모’가 운동회 같은 행사에 참여해 무리를 하고 부상을 입는 경우가 많다는 내용이었다. 거울을 보니 옆머리에 산발적으로 새치가 돋아 있었다. 30대 초반까지 시력은 1.5 혹은 2.0을 기록했었는데, 최근 몇 년간 1.0 언저리를 맴돌고 사물에 초점을 맞추는 시간이 더 소요되는 현상도 걱정을 보탰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코털 정리를 하다 보면 흰색이 섞여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이게 흰색으로 변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었다. ‘너, 노화 중!’이라는 낙인을 받는 듯했다.
남북 간 군사 대치가 지속된다면, 이 녀석이 군대 갈 때쯤 내가 환갑이 된다는 사실도 소름 돋는 일이다. 공적 영역에 고용되지 않는 이상, 그때까지 직장 생활을 하는 경우는 무척 드물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국민연금 수급 시기에도 못 미쳐 경제력을 상실한 아비의 모습을 그려 보니 아찔했다.
걱정 보따리를 안고 출산할 병원에 ‘입학’했다. 담당 교수님께 난임 기간이 꽤 길었고, 첫 출산 치고는 나이가 많은 편이라 걱정이 많다고 털어놨다. 교수님은 대화 중에 A4 크기 메모장에 동그라미를 계속 그리는 습관이 있었는데, 환 공포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까무러칠 만큼 종이 가득 검은 원이 빽빽했다.
종이에 빈 공간이 거의 없어질 때쯤 “임신은 하는 게 어렵지, 유지하는 건 다른 차원”이라며 “무조건 마음 편히 가지고, 당기는 음식 있으면 걱정 말고 먹고, 인터넷에 떠도는 낭설을 경계하라”라고 주문하셨다. 다 듣고 나니 종이 위에 가득 겹친 동그라미 속으로 안착하는 기분이었다.
진료실을 밖에는 적잖이 연배가 있어 보이는 부부들이 젊은 부부들보다 많았다. 이런 추세라면 자녀의 군 입대 날 합동 환갑잔치도 가능하지 않을까?
역시 ‘나만 큰 일 난 게 아니’라는 사실은 위로의 표준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