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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레오 Feb 06. 2020

아이의 두려움은 기회다

진흙 속에 피는 연꽃처럼, 두려움 속에서 실존을 찾아야

직장인의 월요병은 고질적인 병중의 하나다. 일요일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월요일에 대한 부담감으로 좌불안석한다면 당장 컴퓨터를 켜고, 펜을 들어 내일 어떤 예측가능한 일이 있을지 상세히 밝혀보자. 그래도 두렵다면 일요일에 출근하는 수밖에 없다.     


두려움의 그림자

앞으로 일어나는 일이 예측가능하고 조절가능한가? 이 2가지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방법이다. 월요병 극복을 위해 펜을 들어보라는 이유는 예측가능성을 높여보라는 것이다. 어떤 일이 발생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만약 그것을 조절할 수 없다면 지금이라도 그것을 할 수 있는 준비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 어른들이 월요병처럼 겪고 있는 두려움들을 살펴보자. 삶의 다양한 과업 속에 요구받는 우리의 역할들 속에는 이런 두려움들은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두려움은 작게는 긴장에 따른 복통에서부터 공황장애까지 우리 삶에 다양하게 나타난다. 어른들도 이런 수준인데 과연 우리 아이들은 어떨까?     


아이들의 눈망울에 담긴 두려움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서율이. 알아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문선종

아이들도 마차가지다. 올해로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첫째 딸에게는 수많은 과업이 존재한다. 이제 모든 것이 의존적이던 생활에서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 많아졌다. 최근 아이에게 건네는 질문의 대부분이 과업 중심적이다. ‘오늘은 뭐 했어?’ ‘오늘은 혼자서 OOO했어?’ 등 무엇을 스스로 했는지에 대한 질문이 대부분을 이룬다. 신발 끈을 묶는 것부터 화장실에서의 뒤처리까지 혼자 감당해내야 하는 것들이 많다. 그러면서 아이는 혼자 해내야만 한다는 두려움을 느낀다. ‘아빠 없으면 혼자서 어떻게 해?’ 아이들의 눈망울에 담긴 두려움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상담사례 중 아이의 두려움을 부모가 모두 처리해준 나머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는데도 신발 끈을 혼자서 묶지 못하고, 밥을 먹여줘야 하는 아이가 있었다. ‘너무나 귀한 아이’라 아이의 두려움을 부모가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랑의 방식은 다르다. 아이를 아끼려는 부모의 사랑을 비판할 수 없지만 아이가 삶을 주체적으로 살 수 있도록 사랑의 에너지를 전환하기로 목표를 세우면서 아이를 변화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왜 과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냐며 다그치거나 모든 책임을 아이에게 두는 경우도 있는데 적절한 부모의 개입이 필요하다.      


불안은 실존으로 가는 길

이처럼 두려움은 의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이다. 불안은 ‘홀로서기’하며 실존을 만나는 과정이다. 어린왕자에서 나오는 사막에 놓이는 것과 같은 일이다. 고독한 인간의 삶은 사막 그 자체로 표현할 수 있다. 본질적인 고독 속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연습이 ‘실존’을 찾는 것이다. 우리는 평소 아이들이 자신의 실존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사막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우물을 파는 것 혹은 우물을 찾는 것이다. 불안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아시스 같은 나의 실존을 찾는 동반자라고 가르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아이의 뒤에서 따라가기

받아쓰기는 과정이다. 틀리는 것은 오히려 더 좋은 것이다. ⓒ문선종

맹자의 제자 공손추가 “군자가 자기 아들을 직접 가르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물었다. 맹자는 “자식이 부모의 기대만큼 따라주지 않으면 성을 내게 된다. 반면에 자식의 입장에서는 ‘부모 자신도 못하는 주제에 나만 잘하고 올바르게 하라’고 한다며 반발하게 된다.”고 답했다. 이를 두고 대부분이 자식공부는 외주를 줘야한다고 한다. 나의 경험상 이는 틀린 말이다.    

  

부모가 자녀를 앞질러 목적지로 끌고 가기 때문에 성을 내게 되는 것이다. 아이의 실존을 무시한 채 말이다. 말을 우물가에 끌고 갈 수 있어도 물을 마시게 할 수 없다. ‘자기발견’에 대한 갈증, ‘실존탐구’에 대한 갈증을 느끼게 할 수 있다면 자신의 사막에서 우물을 파던지 오아시스를 발견하던지 할 일인데 말이다.      


부모는 조바심이라는 두려움을 버리고, 아이의 등 뒤에 서서 따라가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사실도 알아야한다. 자신의 실존을 찾지 못한 사람은 자녀의 실존을 책임 질 수 없다는 것 말이다. 당신은 사막에서 우물을 파고 있는가? 아니면 오아시스를 찾아 탐험하고 있는가? 돌아보면 좋겠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서율이. 알아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육아 전문 No.1 언론사 베이비뉴스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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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칼럼니스트 문선종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유치원 교사와 결혼해 두 딸아이를 두고 있다. 현재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홍보실에서 ‘어린이가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일을 알리고 있다. 그는 실존주의를 기반한 인간의 주체성과 경험을 중심으로 개인과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가고 있다. moons8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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