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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끔 Nov 16. 2020

고작 밤식빵 하나일 뿐인데

청취자 사연에 왈칵 눈물을 쏟았다


2주간 진행했던 가을 이벤트...


이번 주부터 2주간 청취자 가을 이벤트를 시작했다. 제목은 'All About 秋(추), All About You'... 가을에 누릴 수 있는 소박한 먹거리들, 가을용 맞춤 아이템들을 청취자에게 나누어드리는 이벤트다. 첫날 고구마라테를 드리고 DJ, 작가님과 내일은 또 무엇을 드리나, 회의를 하다가 밤이 제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파밧 - 떠올랐다. 제철 음식이 무엇인지 거의 모르는 나에 비해 우리 DJ, 작가님은 둘 다 그 분야에 해박하다. 밤 얘기 나오지 마자 오케이! 낙찰! 꽝꽝꽝!

 

마음 같아선 밤 한 상자씩 보내드리고 싶지만 우리는 없는 집안이기에... 청취자에게 드릴 수 있는 쿠폰을 하나둘씩 살펴보다 보니 제과점 쿠폰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 밤빵을 드리면 되겠다 싶어 검색해보니 다행히도 밤식빵이 있다. 먹어보진 않았지만 왠지 이거면 되겠다 싶었다. 제과점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니 오전 10시에서 11시 사이에 따끈한 밤식빵이 나온단다. 우리 방송 끝나고 여유 있게 가시라고 하면 되겠다. 체크 완료.

 

청취자들은 이 소박한 먹거리에 엄청난 환호를 보내주셨다. 등산하고 내려오는 길인데 코에서 밤빵 냄새가 나서 못 견디겠다거나, 힘들던 고3 시절 매일 어머니가 사다주시던 밤식빵 기억이 난다거나... 어릴 때 아버지가 군밤을 그렇게 사주셨는데, 아버지는 드시지 않아서 싫어하시는 줄 알았지만 요즘 병원에 입원하시더니 그렇게 군밤을 찾으시더란다. 알고 보니 밤을 좋아하셨음을 뒤늦게야 알게 됐다는...


모두가 밤이 소환해온 구수하고 따뜻한 사연들이다.


뿌듯한 마음에 이벤트를 마치고 프로그램 인스타그램에 달린 댓글도 차분히 다시 읽기 시작했다. 한 청취자의 댓글에 눈길이 멈췄다.


어머니가 폐암 4기 진단을 받으시고, 본인은 회사로 출퇴근하는 대신 병원으로 매일 출퇴근하시는 중이란다. 게다가 아버지마저 건강검진에서 위암이 확인되어 곧 수술을 받으신다고. 어머니가 밤식빵을 참 좋아하시는데 선물드리면서 웃게 해드리고 싶다고.


다른 분은 몰라도 이 분은 꼭 드려야지 싶어 연락처를 남기시라 했더니 그분은 우리 홈페이지 게시판에 인스타그램 댓글에는 채 남길 수 없었던 긴 사연을 남기셨다.


IMF 이후 식당일 하면서 열심히 사신 죄밖에 없는 분들인데, 어떻게 이렇게 두 분 다 암에 걸리셨는지, 하늘이 원망스러웠다고. 나중에 발견된 아버지의 위암은 다른 가족들이나 형제들에겐 알리지 않고 부모님과 맏딸인 본인만 알고 계시다는 내용이었다. 동생들은 군대에 있거나, 임신 중이라 조심스럽다는 이야기.


어머니가 처녀 때 라디오 사연을 보내 당첨된 적이 있어서 본인도 어머니 따라 용기 내서 보낸 사연이었다고. 밤식빵 가져다 드리며 라디오 사연에 당첨된 얘길 드리겠다고 하셨다.


병원에서 어머니와 하루 종일 붙어있다 보니 서로 대화도 많이 하게 됐다며 어머니가, 어머니가 아닌 '소녀'였던 시절의 이야기를 나누니 어머니도 그 시절 소녀로 돌아가신 것 같았다고 하셨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 하고 흘렀다.


그분이 얼마나 부모님을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다른 가족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얼마나 큰 분인지 고스란히 느껴져서다.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 버티고 계신지, 밤식빵을 받은 오늘 하루는 기적 같은 하루라는 그 말씀에 얼마나 기적을 기대하고 있는지 너무나... 느낄 수 있어서.



사실 그분의 사연에서 내가 본 것은 10년 전 내 모습이었다. 건강하던 우리 엄마는 꼭 10년 전부터 아프기 시작했다. 몇 년 간 두 번의 뇌경색을 비롯해...각종 병을 앓으셔서, 구급차도 네 번은 탄 것 같다. 입원도 자주 하셨다.


어머니의 간병을 도맡았기에 병원에서 보내는 날들이 많았다. 출퇴근길 대신 병원으로 향하는 길을 나 역시 겪어 보았고 (심지어 그땐 백수였다.) 병원에서 자고 집으로 잠깐 씻으러 가는 그 시간 동안 버스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원망도 많이 했었다.


우리 엄마도 식당을 하셨다. 새벽 4시면 일어나서 새벽기도를 다녀오시곤 새벽 6시부터 저녁 9시까지 쉬지 않고 일하시던, 10kg이 넘는 사골을 150cm밖에 안 되는 작은 체구로 옮기곤 하셨던 분이다. 나도, 왜 착하고 성실하게만 살아온 엄마가 이렇게 아프셔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알았다. 착하고, 성실하게, 미련하게 살아서라는 걸.


병원의 시간이란, 끝없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불안과 피로를 기약 없이 견뎌야 하는 나날들이다. 위안은  아주 작은 것들에서만 발견할 수 있었다. 아침 먹는 시간에만 병원 편의점에서 살 수 있었던 갓 말아 나온 김밥이나, 한 번 사면 꼭 한 통을 원샷하던 500ml 오렌지 주스. 병원에서 만나는 동병상련의 처지인 사람들이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 창문으로 넘어오는 장미 향기 같은 것들이 오늘의 하루를 겨우 견디게 하고 미래를 기약하게 했다.


'그래, 병원을 나가면 꼭 엄마랑 장미 축제에 갈 거야.' 같은 마음이 들었다고나 할까.  


그 시절엔 버스 창문 너머로 보이던 무지개 하나가 마치 나를 지켜보다 응답하시는 신의 음성을 들은 듯 따뜻하게 느껴지곤 했다. 희망의 증거이길 바랐던 것 같다.


라디오도 내겐 그런 존재였다. 듣다 보면 나오는 이야기가, 노래 한 곡이 지금의 나를 응원하는 것 같았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계속 잘 살아가라고. 죽지 말라고. 그 시간에 하필 그 라디오 프로그램을, DJ의 그 멘트와 음악을 듣게 되는 건 우연이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다.


언제나 기적을 기다리는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기적이 올 것만 같은 암시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날들이었다.


어쩌면 그분께 밤식빵이란 단순한 밤식빵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앞으로, 머지않은 미래엔 좋은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기적의 암시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내가 꼭 그런 마음으로 라디오를 들었던 것처럼. 그리고 정말 거짓말처럼, 몇 년 후 기적처럼 라디오 PD가 돼서 이제는 내가 음악을 들려드리고 밤식빵을 드릴 수 있게 됐다.


그분의 사연이 내 경험과 겹쳐지면서 그 마음에 깊이 공감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 아픔을 알게 해 주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숱한 밤들이 지나고 지금 우리 엄마가 여전히 내 곁에 건강히 계신 것처럼, 그분의 부모님들도 다시 건강한 일상을 찾으시길 소년, 소녀의 마음으로 행복한 노년을 보내시길 진심으로 기도해본다. 그리고 그분께 그 날이 올 때까지 아침엔 부디, 우리 프로그램이 작은 위안이 되기를.  


고작, 밤식빵 하나였을 뿐인데. 기적의 암시처럼, 희망의 증거처럼 받아들여준 분이 있다는 게 가슴 벅차도록 감사한 하루였다.


2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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