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나는 늦둥이다. 형제자매가 없는 외동의 늦둥이다. 아버지 나이 마흔여섯, 엄마 나이 마흔넷에 내가 태어났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부모님은 50대였다.
나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면 주변 사람들은 '어휴, 사랑 많이 받으며 자랐겠네.'라고 말한다. 그런 말을 들으면 속으로 웃는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아이를 떠올려보면 내가 받아온 사랑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랑이 여태껏 나를 지탱해온 근본적인 힘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늦둥이의 삶이 사랑과 평온함만으로 이뤄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특히 외동이라면.
늦둥이라 가장 좋았던 점. 일단 우리 부모님은 나에 대해 큰 기대가 없었다. 그분들이 내게 원하는 건 오직 하나, 건강이었다. 우리 집의 경우 내가 태어나기 10년 전쯤, 건강상의 이유로 오빠가 열 살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더 그랬다. 그저 건강하기만 하면 내 소임을 마친 것이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공부하라는 말도 들어본 적 없다. 공부는 그냥 내가 선택해서 하면 되는 것이었다.
한편으론 성장 과정에서 늘 혼자였다. 부모님은 늘 바쁘셨지만 그걸 떠나 세대 차이가 심하게 났다. 6.25를 몸소 겪으시고 피난 내려오신 부모님께 밀레니얼 세대인 내가 나눌 수 있는 고민이란.. 음.. 별로 없었다. 물론 피난 과정에서의 스펙터클한 이야기를 들으며 생존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긴 했다.
부모님의 지혜는 언제나 내게 영감을 주고 다시 일어설 힘을 주었다. 그러나 내 또래의 부모님이 갖고 있었던 교육에 대한 정보력을 누린다든가, 같이 진로에 대해 고민한다든가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학원도 무슨 학원을 다니라고 등록해주신다기보다는, 친구들이 다니는 학원에 대해 내가 직접 알아보고 얘기하면 학원비를 주는 식이었다.
어린 내가 가진 정보력이 이미 연세 드신 부모님의 정보력보다 늘 앞서갔기에 내 진로에 대한 모든 결정은 스스로 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일찍이 이런 상황을 예측하셨는지 초등학교 2학년 때 선생님이 가훈을 적어오라고 하자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자립정신'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자립정신'을 가훈으로 들고 가자 당시 담임 선생님은 왠지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았고 여전히 그 눈빛을 잊을 수 없는 걸 보면, 내게도 상당히 인상적인 기억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렇게 늦둥이로 자라났고, 마흔을 코앞에 둔 나이가 됐다. 그리고 더 빨리 부모님의 보호자가 되었다. 지금 우리 부모님은 벌써 80대가 되셨고, 우리 가족의 삶에 병원이 빠질 수 없는 단어가 된 건 벌써 10년도 넘은 일이다.
시작은 엄마였다.
처음으로 엄마의 보호자가 됐던 날을 기억한다.
2010년, 당시 나는 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백수였다. 그날도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났는데 뭔가 집안 공기가 이상했다. 아버지는 거실 피아노 의자에 앉아 이마를 긁으며 엄마가 병원에 갔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아빠는 왜 여기 있어,라고 묻고 싶었지만 이어지는 아버지의 말에 입이 막혔다.
"이제 엄마는 환자라고 보면 돼."
아버지는 다시 이마를 긁기 시작하셨고, 나는 그 길로 병원에 달려갔다. 엄마는 '뇌졸중 집중 치료 센터'라고 쓰여 있는 병동에서 막 입원 절차를 밟고 있던 차였다. 아마 같이 일하시는 분들이 엄마를 병원에 모시고 간 것 같았다. 엄마는 몸 한쪽이 마비되는 뇌경색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때 엄마 나이가 꼭 일흔 살이었다.
늘 밝고 건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던 엄마는 그때도 애써 태연한 태도를 보였지만, 환자복으로 갈아입으며 단추를 잘 잠그지 못했다. 그때 엄마를 침대에 앉히고, 엄마의 단추를 처음으로 잠가드렸다. 어릴 적 엄마가 내게 해줬듯이. 곧 간호사가 찾아와서 '김숙자 님 보호자 분!'하고 외쳤다.
"네, 여기요. 제가 김숙자 님 보호자입니다." 내가 대답했다.
그게 내 보호자 인생의 시작이었다. 안타깝게도 주변엔 도움을 구할 분이 없었다.
엄마는 이후에도 뇌경색, 심장 질환을 필두로 여러 병을 앓았거나 앓고 계시다. 응급실과 구급차를 여러 번 들락거리기도 했다. 아버지는 2021년 3월 3일에, 치매 진단을 받으셨다. 당뇨와 고혈압을 앓고 계시고, 몇 년 전에 이미 경도 인지장애 진단을 받으셨기에 오래 마음의 준비를 해왔지만, 이제 정말 올 것이 왔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연세가 드셨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계속 스스로를 설득하는 중이다. 아마 앞으로 더 좋아질 일은 없을 것이다. 아이들은 돌보면 성장하지만, 어르신은 돌보아도 성장은 없다. 내 일은 최대한 부모님이 인생의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게 도와드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리고 아버지가 치매 진단을 받으신 지금... 내가 살아온 보호자로서의 인생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아버지가 치매 진단을 받은 상황이기에 현재 진행형의 간병 일기도 쓰게 될 것 같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 또한 나는 매일 방송을 해야 하는 라디오 pd다. 주말에도 일하러 가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본업이 있는 상황에서 보호자로서 어떻게 하면 가장 현명하게 부모님과 동행할 수 있는지, 계속 고민해보며 나아가려고 한다. 이 공간엔 그 이야기를 담아보려고 한다.
10년 전,
처음 엄마에게 병이 찾아왔을 때는 그 일이 이를 악물고 이겨내면 되는 한 번의 싸움, 혹은 일시적 고난인 줄로만 알았다. 지금은 그게 아니었음을, 아님을 안다. 이건 이길 수 있는, 혹은 이겨야 하는 싸움이 아니다. 어떻게 마지막까지 행복하게 동행할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하는 일이다. 울어야 할 일이 아니라 최대한 어떻게 같이 웃으며 걸을 수 있는지 궁리하고 실천해야 한다. 말이 쉽다. 잘 되지 않는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무너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늦둥이는 오늘도 보호자로서 진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