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나마 여행자가 되어 보는 새벽
갑작스럽게 월요일 출근이 사라진 일요일 밤,
아니 월요일 새벽이다.
쓰고 보니 마치 좋은 일 같지만 비상 상황에
대처하느라 정신없었던 일요일이었다.
급한 일을 모두 마치고 회사를 나서니 밤 11시.
일요일 저녁에 출근한 것도 모자라 밤 11시에
퇴근을 하다니.
여느 때처럼 내 방 같은 스튜디오에서 일을 마치고
사무실 자리로 가니 생일 때마다 회사에서 챙겨주는 문화 상품권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아, 맞다. 나 얼마 전에 생일이었지.
벌써 이렇게 일 년의 반이 지났구나... 싶었다.
요즘은 하루가 일주일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겠다.
생일도 불과 며칠 전 일인데 오래전 일처럼 느껴진다.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모든 책임으로부터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얼마 전 지인의 블로그 글을 보다 어느 날 갑자기
아침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갔다가 그날 저녁 비행기로 돌아왔다는 글을 봤다.
그 글을 보고 옛날 생각이 나서 피식 웃었다.
제일 바쁜 시사 프로를 하던 신입 PD 시절.
금요일 아침에 방송이 끝나고 나면 혼자 가끔씩
즉흥적으로 제주도행 비행기를 타곤 했다.
그게 바다를 볼 수 있는 제일 빠른 방법이었기 때문에.
제주도에 도착해 봤자 운전도 못 하니 갈 수 있는 곳도 많지 않았다.
그저 한동안 공항 근처에서 바다를 바라보다 당일치기로 돌아오는 게 전부였다.
하루 이틀 더 시간 여유가 있으면 바다가 보이는 숙소에 묵으면서 한동안 바다를 보다가 배고프면 혼자가도 이상하지 않은 식당에 가서 밥 먹고 또 가만히 앉아서 바다 보고.
그러다 어두워지면.. 방 안에 들어가서 음악을 들으면서 바다 보고.
'행복한 사람' 한 곡을 조동진과 조동희의 목소리로 번갈아가며 계속 들었던 날도 있었다.
그 곡을 계속 들으면서 스스로를 다독였던 것 같다.
물론 혼자여서 외로웠지만 떠나지 않았다면
훨씬 외로웠을 것 같다.
돌아보면 내가 참지 못하고 제주도 비행기를 탔던 날들은
떠나지 않고는 버틸 수 없을 만큼 견디는 마음이, 감정이 극에 달할 때였다.
그렇게나마 일상을 떠났다가 돌아오면 조금은 나아져있었다.
조금 멀리 일상에서 한 발자국 멀어졌다가 돌아오면
그래도 조금은.
삶에 치일 때는 과거, 현재, 미래가 한데 뒤엉켜있는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어제 하던 일을 오늘 하면서 동시에 내일 해야 할 일도 생각하고 있다.
온갖 책임들이 한 데 뒤엉켜 굴러가다가 갑자기 멈춘다. 아니, 멈추고 싶다.
극에 달한 것이다.
그럴 때 잠시라도, 억지로라도 떠났다가 오면
다시 지금 이 순간에, 현재에 집중하게 된다.
숨이 쉬어진다.
월요일 아침 출근은 사라졌지만
늦게라도 출근해야 할 수도 있어서
비록 나는 오늘 제주도로 떠날 수 없겠지만.
잠시 언제든 이곳을 떠나 '바다를 보러 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도 숨이 쉬어진다.
그런 기억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경기장의 경주마같이 움직이고 있는 나를 들어다가
잠시 여행자 역할에 놓아두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나아지는.
떠나진 못해도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만으로
조금 편안해진 일요일 밤, 아니 월요일 새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