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이제라도 늦지 않았을까요?"

by 한뜰

어느 날 버스를 타고 지나는 길에 청소년상담센터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떨리는 맘으로 온라인 신청을 하고 기다렸다. 대기자가 많아서 몇 개월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안내를 받았지만 상관없었다. 그 기다림 조차 나에게는 희망이었다. 하루하루 사춘기 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막막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학교는 겨울 방학에 돌입했고 그렇게 별다른 외적 스트레스 요인이 없으니 집에서 지내는 첫째의 모습은 꽤 편안해 보였다. 하지만 그래도 사춘기의 힘은 무시무시했다. 급속도로 게임과 휴대폰에 빠져들었고, 입에서 존대가 점점 줄어들면서 예의도 사라져 갔다. 두 눈에는 항상 '무슨 말씀하실지 모르겠지만 무조건 저는 거부합니다.'라는 의미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만한 반항의 눈빛을 디폴트 값으로 설정해 놓았고, 앞에서는 '네.'라고 대답하고 뒤돌아 서자마자 불평불만을 랩처럼 쏟아내기 일쑤였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방금 잔소리를 들은 첫째를 다시 불러 세워 도대체 그게 무슨 비겁하고 예의 없는 행동이냐고 혼을 내면 '아, 알겠어요. 알겠다고요!' 하면서 성질을 부려서 화병이 나도 내가 참아야지, 내가 참지 않으면 큰일 나겠다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첫째의 이름은 우리 가족에게 볼드모트의 이름처럼 여겨졌다.


그렇게 첫째의 사춘기 행동거지에 전혀 익숙해지지 않은 채로 겨울 방학이 지나가고 2월이 되었다. 개학을 한 지 일주일 만에 봄방학이 시작되었고 다행히도 상담 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생각보다 빨리 우리 차례가 온 것이다.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중요한 문제가 생겼다. 이 상담에는 내담자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 내담자인 첫째가 동의하지 않으면 상담을 진행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신청할 때 아주 아주 조심스럽게 엄마가 너를 더 이해하고 싶고, 너는 너 자신을 더 알아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상담을 신청했다고 말을 하긴 했었다. 첫째는 듣는 둥 마는 둥 '네.' 하고 대답했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대답만 들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상담 센터로 데리고 가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조심스럽게 첫째의 눈치를 살피며 나긋나긋한 말투로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접근하여 아이가 강하게 거부하면 다음 기회는 없을 것 같았다.

'강경하지만 부드럽게. 너를 위해서, 엄마를 위해서, 우리 모두를 위해서 한 번만 시작해보자. 절대 너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신청한 게 아니라 때로는 모르는 사람에게 나의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도 아주 좋은 방법일 수 있으니까 우리 한 번 도전해보자.'

그날은 주문을 외우듯 하루 종일 속으로 이렇게 마음을 다지고 다음날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가 보던 유튜브 영상을 함께 보면서 이런저런 농담을 건네다 배고프다는 아이 말에 뭐가 먹고 싶은지 물어보면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역시나 미간이 먼저 찌푸려지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한숨을 내쉬며... 나는 아이가 투덜대는 것이 들리지 않는 척 날짜와 시간을 말한 다음 생각만큼 크게 귀찮고 어려운 일이 아니니 한 번만 가보자고 짧게 이야기한 뒤 재빠르게 방을 빠져나왔다. 아이가 계속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모르는 척했다.


아이와 함께 처음 상담센터에 방문하는 날이 왔다. 집을 나서기 전부터 센터에 도착할 때까지 졸음이 밀려와 칭얼대는 아기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듯 '한 번만 가보자.'란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을까. 아이가 먼저 상담선생님과 상담실에 들어가고 나는 두터운 기초 설문지를 작성했다. 양육 방식, 부부, 조부모에 관련된 질문까지. 솔직하게 적으려고 노력했지만 생각보다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었다. 나의 상처, 남편의 상처, 잊고 지냈던 과거의 기억들을 모두 끄집어내야 했다. 결론은 아이는 40분이 지나서 평온한 얼굴로 상담실을 나왔지만 이어서 내가 들어갔을 때엔 15분 동안 울고 나왔다는 것이다. 상담사를 할 수 있는 자격은 목소리에 달린 것일까, 란 생각이 들 정도로 담당 선생님의 목소리는 '위로' 그 자체였다. 나지막하니 부드럽고 차분하면서 다정한. 온갖 좋은 수식어를 다 붙여도 모자랄 것만 같은 그 목소리에 나는 무너졌다.

"다 제 탓이에요. 제가 잘못 키운 것 같아요."

엉엉 울면서 이제라도 늦지 않은 걸까, 아이의 마음을 회복시킬 수 있을까, 온갖 후회와 불안, 걱정을 쏟아냈다. 상담 선생님은 늦지 않았다, 밖에서 앞으로 더 많은 힘든 일들을 겪게 될 텐데 그런 것들에 흔들리지 않도록 아이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면 된다, 할 수 있다라고 말씀해주시고 너무 자책하지 말라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사실 뭔가 특별하고 대단한 해결책이 제시된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해줄 수 있는, 평범하고 담담한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이었지만 이것이면 충분했다. 이런 속마음을 아무에게나 쉽게 털어놓을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동안 꽤나 힘들고 외로웠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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