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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선 Jun 16. 2022

남편이 내려주는 커피만 마셔요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하루에 한잔 이상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마시 않고서는 정신이 들지 않는다.

그에 비해 남편은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남편이 '소개팅 상대'일 뿐이었을 때,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는 나에게 무슨 맛으로 먹냐고 물었었다. 남편은 맛있다는 나의 대답에 이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연애기간 내내 녹차 음료나, 요거트 음료만 마시던 사람이다. 커피는 맛이 없다던 남편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 건 결혼 후였다.


결혼 후 캡슐커피머신을 장만한 나는 매일 행복하게 커피를 즐겼다. 남편은 기계를 샀으니 맛이나 보자며 나에게 커피 한잔을 주문했다.

어쩐지 설레는 마음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주었다. 남편은 생각보다 괜찮다며 그 뒤로 주말마다 커피 한잔을 나와 함께 즐겨주었다.

그렇게 7년 동안 열심히 커피를 뽑아내던 커피머신은 조금씩 삐걱거리더니 결국 고장이 나고 말았다.



다시 커피 기계를 알아보는데 옆에서 자기가 커피를 내려주는 건 어떠냐고 물어왔다.

그로부터 며칠 뒤, 자꾸만 택배가 왔다. 커피콩과 저울, 그라인더, 필터, 드립퍼, 커피포트, 서버, 그라인더를 청소하는 솔까지. 그라인더는 좋은걸 사야 한다며 30만 원도 넘는 걸 샀다고 했다.

맙소사. 커피 좀 내려달라고 했다가 이게 무슨 일인가.

커피 안 좋아하시던 분 어디 가셨나요? 

바리스타 준비하시는 건가요?



남편은 몇 날 며칠 유튜브를 보며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원두의 종류부터 커피를 내리는 온도, 시간, 커피를 갈 때의 입자 크기까지. 자기 전 침대에 누워서 커피 영상을 보다가 잠들기 일쑤였다.

나에게 꼭 맛있는 커피를 내려주겠다며 기대에 찬 남편에게 나는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나를 위해서라는데.




그렇게 공부한 끝에 내린 커피는 생각보다 맛있었다. 드립 커피만의 부드러움과 함께 커피콩에 따라 달라지는 커피의 맛이 재미있었다.

고소한 맛의 커피를 좋아한다는 나에게 남편은 커피 맛을 잘 모른다며 웃었다. 산미가 있는 여러 종류의 커피를 마셔보며 비교를 해보라나. 

우리 집에 커피 박사가 생겼다.



초를 잴 수 있는 저울을 따로 구매... (집에 저울 있는데..)



남편은 커피 내리는 시간을 초단위로 재가며 커피를 내렸다. 커피콩은 엄격한 기준으로 깨진 건 버리고 온전한 커피콩만을 선별했다. 그러다 보니 커피 한 잔을 내리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평일에 내가 마실 커피를 한꺼번에 내려 병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주었다. 한 번에 4잔 정도를 내리는데, 그 정도 커피를 내리려면 1시간 정도를 내내 서있어야 했다.  

아무리 자기가 좋아해서라지만, 퇴근 후 늦은 밤까지 커피를 내리는 날엔 괜히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쉬고 싶은 마음을 기꺼이 내려놓고 나를 생각해주는 남편이 고마웠다.

커피를 내리는 내내 뒷모습만 보여주던 남편은 등 뒤로 고소하고 달콤한 커피 향이 퍼지면 꼭 나를 돌아봤다. 한밤중에 퍼지는 커피 향에 음- 하며 서로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오늘도 남편이 어젯밤 내려놓고 간 커피에 얼음조각을 넣었다. 나는 남편이 내려주는 커피만 마신다.

물론 지금까지 산 커피 관련 물건들의 값을 생각하지 않을 수없다.


열심히 집에서 커피를 마셔야 한다.



드립커피로 라떼도 만들 수 있다! (진짜 맛있음!)     -    오른쪽 커피는 한 잔 원가가 8000원정도 되는 고급진 커피님





토요일 아침


나에게 커피를 내려주는 사람이 있다

그가 내리는 커피를 마시려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무게를 잰 원두를 그라인더에 갈고

원두 간 것을 드립퍼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내렸다


그동안 뒷모습만 보여주던 그가

음하고 미소 지으며 나를 돌아본다


집안에 가득해진 커피향이

내 온몸을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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