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방지축 얼렁뚱땅 어린 시절
생각해 보면 내가 좀 엉뚱한 생각도 잘하고 창의적이며 상상력도 풍부하고 쓸데없는데서 도전정신이 강한 성격이 된 건 부모님의 영향이 큰 것 같다. 10대까지 자라온 곳은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시골과 가까운 조그만 동네였는데, 내가 어릴 때까지만 해도 아파트 단지에 아이들이 많았다. 물론 도심의 아파트 단지에 아이들이 더 많았을 테지만,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파트 단지 바로 옆에는 조그만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날이 풀리기 시작하는 5-6월부터 가을이 문을 두드리는 9월 초까지 나는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귀가하면 책가방을 집어던지고 개울가로 뛰어갔다. 그 당시 놀던 친구들이랑은 약속 따윈 하지 않았다. 그냥 집에 와서 엄마가 차려준 간식 먹고 개울가에 가면 모든 애들이 다 있었다. 처음 본 애도, 낯은 익지만 이름 모르는 애도 개울가에서는 모두 친구였다. 그렇게 입술이 시퍼레질 때까지 바들바들 떨면서 놀다가 어두컴컴해지면 집에 들어가서 뜨끈한 물로 목욕하고 저녁밥 먹으면 하루가 다 갔다. 개울가뿐만 아니라 아파트 뒷산에도 남자애들이랑 탐험하러 나뭇가지 하나 들고 갔다가 들개 만나서 울면서 뛰어온 적도 있고, 우리 단지 놀이터는 시시하다는 이유로 옆단지 놀이터 가서 놀다가 엄마가 찾으러 오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사실 우리 아파트 사는 사람들 중 내 이름을 모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허구한 날 집에 붙어있는 시간이 없이 여기저기 쏘다니니까 엄마가 걱정된 나머지 맨날 '○○○ 어린이 집에 빨리 들어오세요, 부모님이 찾고 계십니다'라는 멘트를 경비실 통해 방송했으니까… 하지만 단지 밖 세상을 탐험하던 나는 그 멘트를 들을 리가 없고, 집에 들어오면 엄마의 걱정이 담긴 맴매를 맞고 맛있는 저녁밥을 먹었다.
생각난 일화 중 하나는 내가 하도 개울가에 가서 놀다가 감기에 걸려 오니까 엄마가 개울 금지령을 내렸는데 새하얗게 까먹은 나는 또 개울가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은 채 놀아버린 것. 해가 뉘엿뉘엿 지는 7시쯤 됐나, 슬슬 배가 고파져 집에 가려고 하다가 문득 엄마가 개울 금지령을 내린 게 생각났다. 이미 온몸은 젖어있고 집에 바로 가면 혼날 게 두려워 나름 꾀를 생각해 낸 게, 옆단지 아파트는 비상계단이 외벽에 있어 당시 옥상에 올라갈 수 있었다는 것. 여름이라 해가 늦게 지는 것을 이용해 바로 아파트 옥상으로 뛰어가 해가 가장 잘 드는 곳에 몇 분 누워 있었다. 옥상 바닥도 뜨끈뜨끈하게 데워진 상태고 햇빛을 직빵을 쬐니 솔솔 잠이 왔는데 문제는 그 상태로 잠들어버렸다. 눈 뜨니까 사방은 어두컴컴하고 무서운 마음에 울먹이며 아파트 1층으로 내려갔는데 세상에 사방이 난리였다. 애가 사라졌다고, 분명 친구들이랑 놀다가 집에 간다고 헤어졌는데 집에 안 들어온다고. 나는 속으로 '누가 엄마 속을 저래 썩이나'하며 집에 갔는데 그 애가 나였다. 뒤지게 맞았다.
자초지종을 들은 엄마는 결국 개울 금지령을 해제하는 대신 어두워지기 전에는 꼭 집에 들어오라는 약속을 받아냈다. 하지만 그 마저도 잘 지켜지지는 않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육아 난이도 극상이라 엄마한테 그때 나를 어떻게 키웠냐고 물어봤는데, 엄마 아빠도 둘 다 시골에서 자유롭게 자라서 가끔 내가 너무 늦게 들어와서 걱정되는 거 빼고는 크게 컨트롤하지 않았단다. 자라온 환경의 일부지만, 이런 식으로 성장 과정에서 부모님의 극성 참견이 없던 게 어쩌면 내가 자유로운 마인드를 가진 사람으로서 자랄 수 있는 배경이 되지 않았나 하는 갑자기 든 생각. 엄마 아빠, 이런 날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