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선생님 Jan 18. 2018

관계의 법칙 : 나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  

섣부르게 나와 같다고 정의해버린 사람에게는 이상한 실망감이 들었다 

그 남자는 내 옆 침대를 썼다. 배낭여행을 막 시작했던 스무 살 초반이었다. 스페인 그라나다의 허름한 호스텔에서 그 남자를 만났다. 


알함브라 궁전에 가려면 어디서 버스를 타야 하냐고 묻다가 같이 밥을 먹었다. 싸구려 빠에야였다. 나는 이런 싼 맛을 좋아한다고 하니 남자는 나도 그렇다고 했다. 나는 이다음에 바르셀로나에서 갈 거라 하니 남자는 자기도 바르셀로나에 갈 거라 했다. 그러면 이거 먹고 같이 맥주 한 잔 마시러 가겠냐고 물으니 그러겠다고 했다. 오후 2시였다. 


스페인 그라나다 알함브라궁전 


우리는 취향이 비슷했다. 


유명한 미술관에 줄을 서는 것보다는 길거리에서 마시는 맥주가 좋다고 했다. 프랑스보다는 포르투갈이 좋고, 비행기보다는 야간열차가 좋다 했다. 성당을 보는 건 지루하다고, 어서 터키에 가서 패러글라이딩을 하고 싶다는 말에 맞장구치는 나에게 그 남자는 '우린 참 비슷해'라고 했다. 그 말이 '우리는 운명이야'처럼 들려서 '나는 멀미를 심하게 해서 패러글라이딩을 직접 하지는 못 할 거 같다'는 말은 꿀꺽 삼켰다. 


안지 며칠밖에 안됐지만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친구마냥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과의 대화는 자연스레 다음에 만나자는 말로 이어졌다. 




2 주가 지나서 우린 다시 만났다. 바르셀로나에서의 첫날이었다.


‘몬주익 분수쇼 보러 갈래?

‘나 그거 완전 보고 싶었어.’ 


몬주익 분수쇼가 뭔지도 모른 채 밖으로 나섰다. 며칠 만에 본 그 남자는 조금 더 까매져 있었다. 케밥을 사 먹고 계단에 앉아서 분수쇼를 봤다. 식어빠진 케밥은 맛이 없었고, 세계 3대 분수쇼라던 분수쇼는 볼품없었다. 완벽한 저녁이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운명 같았다.


꽃이 잔뜩 펴있는 테라스에 나란히 앉아 맥주를 마실 때 그렇게 생각했다. 같이 알함브라 궁전에 가기로 했던 친구가 갑자기 아파서 단둘이 점심을 먹으러 갔을 때는 그러려니 했다. 다음에 이동할 도시가, 그리고 이후의 여행 일정이 비슷한 것도 우연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건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유럽 한 복판에서 이렇게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난 게 우연일까? 


우리는 이스탄불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그게 그 남자와의 마지막이었다.  


터키 괴레메 


낯선 타인과 내가 짧은 시간 동안 ‘우리’가 될 수 있었던 건 ‘나와 비슷한 사람이다’는 섣부른 판단 덕이었다.   


남자와 나는 ‘나도 그래’라는 말을 많이 했다. 난 이미 미술관을 많이 가서 더 이상 미술관에 가고 싶지 않았다. 남자는 비싼 미술관 입장료를 감당할 수 없어서 미술관에 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 비슷한 사람이라 고 말했다.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날까지 매일 메신저를 했다. 그리고 매일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이란 걸 깨달았다. 물론, 취향이 다른 사람과 연인이 되기도 하고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섣부르게 ‘우린 정말 비슷해!’라고 정의해버린 사람에게는 이상한 실망감이 들었다. 


나는 내 멋대로 타인을 정의하고 그것에 호응하지 못하는 타인에게 실망했다. 나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타인은 없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허겁지겁 내 일부를 꺼내놓고 상대방이 나와 비슷한 조각을 꺼내길 기대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퍼즐 맞추기는 실망으로 끝났다. 




이후에 나는 나와 완전히 다른 남자들을 만났다. 영화 취향부터 입맛까지 뭐 하나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남자들이었다. 유럽의 테라스에 나란히 앉아있을 일도 없었고 분수 쇼를 볼 일도 없는 평범한 만남이었다. 


그들은 내가 관심 없는 장르의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가끔은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음식을 먹으러 가자고 조르기도 했다. 그렇게 본 영화 중 일부는 재밌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음식은 맛있었다.  


더 이상 그들을 내가 원하는 이상향에 끼워 맞추려 하지 않았다. 섣부르게 ‘우리’라는 원을 만들고 그 안에 타인과 나를 욱여넣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너와 내가 완전히 다르더라도, 가끔은 네가 나를 이해할 수 없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가끔 비슷한 점을 발견하면 ‘이건 운명이야!’라고 말했다.


타인을 완전한 타인으로 받아들일 때야 비로소 연애는 시작됐다. 내 모든 걸 상대방이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다는 걸 인정해야 나 자신도 온전히 내보일 수 있었다. 


덕분에 몇몇의 사랑스러운 순간들을 쌓을 수 있었다. 가끔은 서울의 한 복판에서 평범하게 만났더라도, 너와 내가 비슷한 점이 단 하나도 없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좋은 인연일 수도 있지 않겠냐고, 그러니 맥주 한 잔 하러 가자고 하며 운명 같은 사랑을 시작하기도 했다. 

작가의 이전글 다들 가끔씩 불행하면서 살지 않아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