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인어공주와 맥주병

5주 남미 탐험 — 갈라파고스, 이사벨라

by 달해영

심심하지만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이사벨라 섬에서 하루 만에 권태로움을 느꼈다. 아무런 일정이 없어 편도로 끊어 들어간 갈라파고스. 나가는 날이 정해져 있지 않아서일까, 해산물도 수영도 즐길 수 없어서일까. 나름의 방법을 찾아 씩씩하게 지내고 있는 나 자신을 대견하게 느끼기가 무섭게 여행이 무료해졌다.


그 권태에는 호기롭게 도전했다 실패로 끝난 스노클링의 탓이 컸다. 기가 막히게 겹친 생리 기간에 난생처음 탐폰까지 시도한 뒤 바다로 갔었다. 산 크리스토발 섬의 라 로베리아에서 했던 수영 덕분에 자신만만하게 아무런 장비도 없이 나선 게 원인이었다. 바다에 몸을 넣자마자 물 먹은 티셔츠 때문인지 몸이 가라앉기만 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바닷물은 계속 입으로 들어왔고 허우적거리면서 "Help!" 외치는 나에게 헤엄쳐 온 근처 사람들 덕분에 겨우 뭍으로 나왔다. 그날 나에게 도움을 준 남자 한 명이 오늘 비치에서 페스티벌을 하는데 올 생각이 있냐고 물었었다. 같이 노는 건 달갑지 않아 저녁에 혼자 걸음 해보았더니 웬 어린 남자애가 나에게 물총을 막 쏘아댔다. 하지 말라는데도 짓궂은 표정으로 날 겨냥하는 그 아이에게 화가 났는데 괜히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싶어 더 격한 반응을 하지 못하는 나한테도 화가 많이 났다. 수영은 마음처럼 되지 않고 현지 남자애는 물이나 쏴대고 마땅히 혼자 놀 거리를 찾지 못하는 여러 상황들이 나를 축 늘어지게 했었다. 나는 이렇게 외로운데 밤마다 숙소까지 들려오는 바닷가 페스티벌 음악은 너무 신나기만 해서 그 대비가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여기서 볼 수 있는 걸 보러 갔다 오자!' 하는 마음으로 거북이 브리딩 센터에서 아기 거북이들을 보고, 홍학이 산다는 연못에 가서 자연 홍학 세 마리를 만났다. 다시 마을로 돌아와 걷고 있는데 누군가 "Mooooooon~~!" 하고 외쳤다. 소피아였다. 소피아가 누군가 하면 산 크리스토발 섬에서 한 키커락 투어의 가이드이자 동갑내기 친구라고 소개할 수 있다. 살고 싶어도 아무나 살 수 없는 갈라파고스가 소피아의 고향이라고 했다. 갈라파고스의 바다를 정말 사랑한다고 했던 소피아는 나와는 다르게 꼭 낙원 속에 사는 동화 주인공처럼 보였다. 한국의 정상적인 나이 범주에서 내 나이는 한국에서는 뜻이 없어도 일단 대학에 가야 하는 시기였는데,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삶을 사는 이런 세상도 있구나. 다양성이 존재하는 삶이라는 또 다른 세계를 소피아를 통해 처음 알았다. 바다를 사랑해서 매일 바다에 나가는 삶을 사는 사람. 그날 바닷속을 유영하는 소피아는, 물에 뜨지도 못하는 맥주병인 내 눈에는 꼭 인어공주 같았다. 키커락 투어에서 나는 소피아의 보호 아래 드넓은 갈라파고스 바다를 마음껏 누볐다. 거북이와 상어를 발견하고선 입에 물고 있는 스노클 때문에 소리만 낼 수 있는 비명을 지를 때마다 소피아는 내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황급히 수면 위로 고개를 뺐다가 안심하며 웃곤 했다. 친구로서도 가이드로서도 나에게 또 다른 세상을 열어준 소피아와 마지막 작별 인사를 제대로 하고 싶어서 투어사를 세 번이나 찾아갔는데도 만나지 못하고 떠나온 참이었다. 그런 소피아를 뜬금없이 이사벨라 섬 한복판에서 마주친 거다. 수영복 위에 얇은 옷을 하나 걸친 자유로운 복장을 하고선 자전거를 끌며 나에게 다가온 소피아. 얼굴 못 보고 떠나야 해서 아쉬웠다고 했더니 친구네 집에서 다 같이 모여 저녁을 먹을 건데 같이 가자는 말에 얼굴도 모르는 친구의 집으로 함께 향했다.


스물두 살이라고 소개하는 나에게 고개를 갸웃거리던 소피아. 한국에서는 태어나면 그때부터 한 살이라고 설명했더니 왜 그런 거냐고 묻는 그 친구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분명 우리 둘의 출생 연도가 같은데 나이가 다르다는 게 의아하게 느껴질 만도 했다. 나이라는 게 얼마나 생각하기 나름인 건지에 대해 그때 처음으로 인지했던 것 같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십 대 초반에는 대학 생활을 한 뒤 중반에는 취업을, 이십 대 후반부터 삼십 대 정도에는 결혼을 하는 그런 정상성을 당연히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너무 당연해서 이상하다거나 좀 벗어나도 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조차 없던 때였다. 미친 척하고 일단 남미로 떠났지만 뿌옇고 희미하게 보이는 내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이미 배낭여행으로 유명해진 몇몇 사람처럼 이 여행 한 번이 드라마틱하게 내 인생을 바꿔 놓을 거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나라는 사람 자체가 어떤 식으로든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 떠났었다.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를 즐기고 싶다는 마음이 컸는데 그 꾸밈에는 단순히 외적인 것만이 해당되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나를 포장하기 위해 애쓰던 모든 것들을 하나둘씩 내려놓기 시작했다. 화장품을 시작으로, 정상성이라는 이제는 기이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프레임을.



IMG_8013.PNG 자연의 소피아


IMG_7995.jpg 이사벨라에서 만난 sun cafe!
IMG_8005.JPG 왼쪽 소피아, 오른쪽 소피아의 친구 마리아. 내 하트를 열심히 따라 했다.
IMG_7696.JPG 조금 숭한 간판...
IMG_7694.JPG 소중한 아기 거북이들
IMG_7695.JPG 땅거북! 거대하고 신비롭고 경이롭기도 했던 동물.
IMG_7705.JPG 자연산(?) 홍학이 하나 둘 셋
DF0CA9B1-0B94-483C-B4AE-994337052AFF.JPG 산타크루즈 섬,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산 뒤에 발견한 보라색 벽 앞에서.
IMG_8131.jpg 산타 크루즈 섬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완성한 내 다이어리.


keyword
이전 06화(4) 거북이의 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