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거북이의 선물

5주 남미 탐험 — 갈라파고스, 이사벨라

by 달해영

갈라파고스의 섬과 섬을 잇는 교통수단은 페리. 우리가 흔히 "갈라파고스"라고 부르는 "갈라파고스 제도"는 19개의 화산섬으로 이루어진 군도인데, 그중에서도 "산 크리스토발", "이사벨라", "산타 크루즈" 세 섬이 갈라파고스의 주된 여행지다. 키커락 투어에서 만난 알렉산드라와 소피아가 이사벨라 섬을 무조건 가보라고 추천해주기도 했고, 무엇보다 육지로 나가는 비행기를 산타 크루즈에서 타야 했으므로 자연스레 산타 크루즈는 마지막 행선지가 되어야 했다. 산 크리스토발과 이사벨라 섬을 직통으로 잇는 페리가 없어 무조건 산타 크루즈 섬을 경유해야 해서 하루는 완전히 이동하는 데에만 쓰게 됐다. 전날 이사벨라 섬으로 가는 페리 티켓을 예약해 두어 이른 아침에 숙소를 나서기로 되어있었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뜨고 이르게 준비를 끝냈다. 괜히 아쉬운 마음에 남은 시간은 마당에 있는 해먹에 누워있는데 숙소 아저씨가 오더니 내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갔다. 분명 전날밤에 나한테 몇 시에 나갈 거냐 묻더니 그 시간엔 자기가 없을 거라면서 애틋하게 미리 작별 인사를 했건만 어느샌가 나타나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아저씨는 그 뒤로도 나만큼 마음을 준 숙박객을 수도 없이 만났겠지만 그중 대부분을 다시 만날 수 없었을 테니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매번 애틋하게 인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의 아쉬움이 마음속에 후회로 남지 않게 하려면.


전속력으로 달리는 배는 파도의 모양을 따라 통통 튀었다. 두 시간 반쯤 바다 위를 달려 산타 크루즈 섬에 도착했다.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청량한 색감의 바닷물 위에는 마린이구아나가 헤엄을 치고 있었고, 항구에 내렸을 땐 벤치마다 자리 잡은 바다사자들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비현실적인 그 모습이 그땐 이미 너무 익숙해진 후였다. 파도 타는 이구아나, 물감 같은 바다에서 헤엄치는 가오리와 화이트팁 상어, 벤치를 차지하고 낮잠 자는 바다사자들. 어디에 시선을 두든 여기저기 분포돼 있는 다양한 동물이 갈라파고스의 정체성이었다. 통통한 바다사자들을 대수롭지 않게 지나쳐 항구 앞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산타 크루즈에서 이사벨라로 가는 배편은 하루 두 번. 오전 배는 내가 산타 크루즈로 향하는 동안 이미 출발한 터라 오후 두 시 배를 타기까지 약 네 시간을 버텨야 했다. 어린이용 조식 세트에 크루아상을 추가해 배를 채우고,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받아서는 가장 먼저 엄마에게 오늘의 내 일정을 보고한 뒤에 밀린 일기를 썼다.


2월 9일. 여행이 시작된 지 8일째이자 이사벨라 섬에서의 둘째 날. 발품 팔아 구한 숙소로 옮긴 뒤, 바이크숍에서 산악용 바이크를 빌렸다. "눈물의 벽"까지 트레킹을 하기 위해서였다. 평지에서 자전거 타는 것도 숨차하는 저질체력인 내가 자전거를 타고 산에 올랐다. 이사벨라도 갈라파고스이니 당연히 바다를 즐길 수 있지만 산을 즐길 수도 있는 섬이었기 때문이다. 호기롭게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두 다리는 무거워져서 페달을 밟기도 힘들었고 바퀴가 큰 자전거는 무겁게만 느껴졌다. 출발을 함께한 미국인 부부도 시야에서 사라지고 마침내 혼자 남아 고독하게 올라야 했다. 무슨 훈련하는 사람도 아닌데 외롭고 힘겹게 그 길을 견뎠다.


아마 끝에 가서는 자전거를 손으로 끌면서 다리로 걸었던 것 같다. 그때 할머니 낸시를 만났다. 72세의 낸시도 오르는 길을 나는 헛구역질해가며 겨우 올랐다. 콧물이 줄줄 흐르는 것도 모르고 새빨갛게 익은 얼굴을 한 채 마침내 맞이한 The Wall Of The Tears. 낸시의 가이드 카를라가 We got it! 하는 순간에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어느새 우리는 한 팀이었다.


거북이 주의 표지판이 곳곳에 세워져 있고, 이구아나가 지나가는 길이니 속도를 줄여달라는 낭만적인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그 길 위에서 나는 육지거북이와 이구아나를 만났다. 한눈에 봐도 두껍고 무거운 등딱지를 얹은 채 느릿느릿 그렇지만 힘차게 길을 가는 아주 커다란 육지거북이. 내리막길 자전거의 속도를 즐기다가, 거북이를 발견한 순간 자전거는 팽개치고 근처로 다가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육지거북은 정말로 느리게 걸었다. 뒤뚱뒤뚱 걷는 그 커다란 거북이를 영상으로 담으면서 화면 너머로도 쳐다보고 있자니 새삼 이 생명체가 경이롭게 느껴졌다. 아주 느리지만 자기의 갈 길을 그저 걷는 거북이. “거북이보다 열심히 사는 생명체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중얼거림이 절로 나올 만큼 눈물겨운 동물이었다.


좁은 길을 막아버린 거북이도 만났었다. 빈틈으로 조심조심 지나가려는 내게 콧김을 훅! 내뿜으며 목을 쑥 넣어버리는 겁쟁이 왕거북이들이 환영해 준 나의 내리막길은, 오른 자만이 맛볼 수 있는 짜릿함을 마주한 곳이었다. 땀을 모조리 말려주는 바람은 오르막을 견딘 후에야 맞이할 수 있는 내리막의 선물. 그날 정상에서 내려다본 이사벨라 섬과 내리막길에 만난 거북이는 여전한 짜릿함으로 남아있다.


그때 "생각보다 더 아름답고 기대 이상으로 마음에 들지만, 물 비린내가 심하고 먹을 건 더 없는 이사벨라에서 나 나름대로 씩씩하게 살고 있는 중이다."라고 일기에 적었다. 내가 수영을 할 줄 알았더라면, 해산물을 즐겨 먹는 사람이었다면, 현지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찾아 열심히 돌아다니는 여행자였다면. 온갖 "만약"들이 언제나 나를 둘러싸고 있다. 처음 남미에 갔을 때에도, 그 뒤로 두 번의 남미 여행을 더 했을 때에도, 인도와 유럽을 여행했을 때에도. 그렇지만 나는 매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했다. 해산물이 가득한 갈라파고스에서도 내가 먹을 수 있는 피자와 햄버거와 오렌지주스로 배를 채웠고, 수영을 못 하는 대신 두 다리를 이끌고 산에 올랐다. 세상의 모든 것을 거부감 없이 즐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좋겠지. 하지만 나처럼 그게 불가능한 사람도 있는 법이다. 모든 여행의 과정에서 나는 나름대로 씩씩하게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면서 성장했다.


내리막길에 만난 대왕 육지거북이!
숙소 옮겨놓고 나서 가벼운 짐만 챙겨 나섰던 트레킹.
낸시와 나
눈물의 벽 앞
좁은 길을 다 차지한 거북이. 조심조심 지나가려고 했지만 낙엽을 밟은 발소리가 겁이 났나보다. 의도치 않게 겁을 줬다. 목을 쑥 넣어버린 거북이
두 마리가 줄지어서!
이사벨라로 이동하던 날. 이구아나로 S를, 망치상어로 G를 표현한 게 기발한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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