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주 남미 탐험 — 산 크리스토발
갈라파고스에서의 둘째 날. 누군가 체크아웃하고 새로 빈 싱글룸에 내가 체크인했다. 산 크리스토발에서의 내 일정은 숙소 예약이 가능한 날만큼으로 자연스레 정해졌다. 하루에 25달러씩 75$를 부르는 아저씨에게 약간의 징징거림을 섞은 흥정으로 68$까지 깎았다. 갈라파고스는 햇빛이 뜨겁고 정말 더워서 에어컨이 필수였는데, 에어컨 달린 방이라고 했던 아저씨의 말을 믿었으나 그 방은 에어컨이 고장 나 있었고 선풍기 한 대가 털털 돌아가고 있었다. "나빠!! 에어컨 된다고 했잖아!! 그럼 더 깎아줘야지!" 하고 리셉션에 올려둔 돈에서 2$를 뺏어오는 나에게 아저씨는 와이프한테 혼난다고 하면서도 결국 져주었다. 육지에서 에어컨 수리 기사가 오늘 올 거니까 하루만 참으라고 했다. 그날은 우리가 라 로베리아로 스노클링을 간 날이었다. 다 함께 거실에서 저녁을 먹고 있을 때에도 아저씨는 자꾸만 나에게 에어컨 얘기를 했다. 저기 너무 더워서 못 잔다고 한국말로 받아치는 나와 영어로 할 말을 하는 아저씨는 하루 종일 에어컨으로 투닥거렸다.
그날 우리는 스노클링 스폿인 "라 로베리아 La Loberia"에 가기로 했다. "우린 이거 너무 타보고 싶었는데 햇빛 너무 뜨거우면 선영이는 앞에 타도 돼!"하고 말하는 언니들을 따라서 트럭 짐칸에 올라탔다. 갈라파고스에서는 픽업트럭을 택시로 사용한다. 배낭을 싣기에도, 주변을 구경하기에도 안성맞춤인 택시. 라 로베리아에 도착해서는 탐험대처럼 일렬로 늘어서서 현무암 길을 따라 걷는 길에 꼬리가 잘린 이구아나와 푸른 발 부비새를 만났다. 다시 바다로 내려가서 코 앞에 스쳐가는 바다사자들과 수영을 했다. 해변가에 쓸려오는 파도에 몸을 맞춰 누워 둥실둥실 떠있기도 하고, 마스크에 바닷물이 들어갔는데도 억지로 눈을 뜨고 수영하고 있던 예지언니를 보고 다 같이 웃기도 했다. 용욱의 지나치게 커다란 물장구에 '뭐야;;'하면서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었더니 우리 넷 모두가 같은 표정으로 같은 타이밍에 올라와 있었다. 상황파악을 하자마자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수영에 심취해 아주 멀어진 용욱을 바라보면서 "저 사람 물에 빠지면 누가 갈지는 가위바위보로 정하는 거다……."하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광란의 스노클링을 즐기는 그는 몰랐을 비하인드 스토리.
언니들과는 헤어지는 게 정말로 아쉬웠다. 다음 날 갈라파고스를 빠져나가는 언니들의 일정을 쫓아가 내내 따라다니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갈라파고스 입도 겨우 이틀 지난 게 아니라 여행이 며칠 진행된 상황이었다면 정말로 따라나섰을지도 모른다. 언니들은 육지로 나갔고, 키커락 투어까지 함께 한 용욱도 숙소를 옮겨 다시 혼자가 되었다. 깔끔하게 샤워를 마치고서 전날 다 함께 저녁 먹을 때 언니들이 사 왔던 크리스버거에 갔다. 나는 해산물을 먹지 못하니까 버거가 가장 만만했다(끝내주는 맛집이기도 했다). 직원에게 부탁해 내 사진을 남기고, 벽에 있는 낙서를 구경하다 언니들의 흔적을 발견해서 그 옆에 내 이름도 추가로 남겨놓고 나왔다. 이렇게라도 끼고 싶은 마음과 아쉬운 마음을 함께 담아서 이름을 꾹꾹 눌러썼다.
마을에 도착했을 때부터 알록달록 귀엽다고 생각했었으니까 마지막 날은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콜라주를 만들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색 벽 앞에서 내 사진을 찍기로 했다. 삼각대를 세워놓고 벽 앞에 철퍼덕 앉아서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무표정을 장착하고 사는 타입이라 최대한 다양한 표정을 지어보려니 영 어색하기만 했다. 동네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면서 겹치지 않는 색깔의 벽을 찾아 열심히 돌아다녔다. 웃어도 보고, 무표정으로 렌즈를 응시하기도 하고, 카메라를 들어도 보면서 애썼다. 이후로 나는 알록달록한 동네에 가면 늘 그런 사진을 수집하는 습관이 생겼다. 나는 그걸 내 멋대로 "알록달록 컬러링북"이라 칭한다. 온 동네를 돌면서 열심히 사진을 찍고 마지막은 벽화가 화려한 우리 숙소 앞에서도 찍었다. 내내 나를 좋아하던 숙소 아저씨는 나한테 그 사진을 보내달라고 했다. 아주 보고 싶을 거라고 말하면서. 투닥대다 정이 든 모양이다.
도착 첫날 용욱의 방 한편에 가방을 내려놓은 뒤 카메라를 챙겨서 부둣가로 나갔을 때 비린내가 훅 끼쳤다. 바닷가의 비린내, 테트라포드 근처에 누워있는 바다사자들의 냄새들이 섞였던. 예민한 후각 탓에 평소에는 기겁하는 그 비린내가 그땐 그렇게 반갑고 신이 났다. 정말로 본격적인 내 여행이 시작된 거라는 상징 같았던 그 비릿한 냄새. 나의 산 크리스토발 섬은 알록달록하고 비릿했으며 밤하늘의 별도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동물들도 온갖 것들이 반짝였다. 마지막 밤 숙소 마당에 있는 해먹에 누워 반짝이는 별들을 가만히 쳐다보면서 생각했다. 나는 영원히 이 처음을 잊지 못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