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떻게든 마주친 행운

5주 남미 탐험 — 갈라파고스, 산 크리스토발: 나의 사랑하는 언니들에게

by 달해영

종종 생각한다. 수영은커녕 물에 뜨지도 못하는 내가 다이버들의 성지 갈라파고스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미래의 내가 보낸 신호였을지 모른다고. 너는 거기서 아주 멋진 경험을 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거야. 더 빛나는 사람이 되는 분명한 첫 단추가 될 거야. 그러니까 몇 시간이 걸리더라도 거길 가야 해. 어느덧 서른을 코 앞에 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갈라파고스가 남미 여행의 첫 목적지였던 건 내 간절함이 빚어낸 결과일 수도 있겠다고 느끼기도 한다.


이른 새벽 공항에 도착해 약 두 시간의 비행을 한 뒤 도착한 산 크리스토발 공항. 활주로와 작은 공항 건물 하나만 있는 휑한 땅 위에 내렸다. 수화물 벨트 앞에 서서 백팩을 기다리는데 누군가 한국인이냐고 말을 걸어왔다. 알고 보니 나를 과야킬 공항에서부터 봤단다. 보통의 한국인들 여행 루트는 산타크루즈 섬으로 입도해 산크리스토발 섬에 마지막으로 들르게 되는데, 본인처럼 그 루트를 반대로 타고 있는 나를 발견한 거다. 아르헨티나에서 시작한 여행을 끝내기까지 일주일 정도 앞두고 갈라파고스에 도착했다던 용욱은 숙소를 아무것도 예약하지 않았다는 나에게 일단 자기가 예약한 숙소로 같이 가는 건 어떻겠냐고 물었다. 부킹닷컴에 "산 크리스토발"로 지역을 설정해 검색했을 때 아무런 숙소도 나오지 않길래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하고 온 건데 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방이 없을 가능성은 일단 둘째치고 아는 게 없으니까 한국인을 믿기로 한 거다. 도착해서 보니 용욱이 예약한 숙소는 갈라파고스 여행 글에서 추천하는 숙소로 종종 등장하던 HOSTAL GOSEN이었다. 리셉션 아저씨에게 방이 있냐고 묻자, 오늘은 예약이 다 찼고 내일 싱글룸이 비는데 일단 저 방에서 같이 자고 내일 방을 옮기는 게 어떠냐는 답이 돌아왔다. 아저씨가 말한 "저 방"은 용욱이 예약한 방이었다. 다행히 싱글침대 두 개가 있는 방을 예약한 덕분에 하루만 신세를 지기로 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랑 만나자마자 방을 같이 쓰게 됐다. 정말로 어떻게든 되고 있었다.


다음날엔 같은 숙소에 머무는 한국인 세 명과 함께 스노클링을 하러 가기로 했다. 내 간절함이 빚어낸 결과 같다고 생각하는 그 언니들을 그때 만났다. 자존감이 낮고 외모에 대한 집착이 심했던 스물둘의 나는 그것들에게서 간절히 벗어나고 싶었다. 다양하게도 나를 갉아먹는 그것을 떨치고 싶었다. 꽃보다 청춘의 페루 편에서 유희열은 평소에 길거리에서 춤추는 모습을 사실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현지의 페스티벌 속에 들어가 몸을 흔드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꽃보다 청춘 시리즈에서도 페루 편을 가장 아끼는 이유는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왠지 나도 남미에 가면 저렇게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마음속에 그런 꿈을 품고 오른 여행길이었다. 여행 초기에 언니들을 만나서 그 바람을 이뤘다. 나의 모든 여행을 통틀어 내게 찾아온 커다란 행운 중 하나라고 여긴다. 카메라 앞에서 웃을 수 있게 되었고, 입을 가리지 않고도 웃을 수 있게 되었고, 내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따위에 대한 고민을 떨치고 지금 순간을 즐길 수 있었다. 활짝 웃는 모습이 예쁘다고 말해주던 사람들 덕분에. 혼자 돌아다니다 상점에서 샀던 상어 프린팅의 긴소매 티셔츠와 흰색 단화가 너무 잘 어울린다고, 어쩜 이렇게 예쁜 걸 잘 골랐냐고 진심을 다해 칭찬해 주던 언니들 덕분에. 언니들을 딱 그때 만나지 않았다면 그때의 여행 사진은 전부 얼굴을 가렸거나 안 나오게 찍었을 텐데 단 하루 함께한 그 시간이 나의 몇 년을 바꿔 놓았다. 그러니까 나의 간절함이 닿은 인연인 거다.


인터스텔라처럼 정말로 어린 나에게 신호를 보낼 수 있다면 몇 번이고 시도해서라도 바꾸고 싶은 과거의 순간들이 있다. 반대로 몇 번을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 생각하는 시간도 있다. 남미로 향하는 항공권을 사는 당시의 나는 5주도 충분히 길다고 여겼는데 막상 가보니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그래서 돈을 더 모은 다음 더 길게 여행을 떠났더라면 어땠을까 종종 생각했지만, 그럴 때마다 곧바로 생각을 고쳤다. 그랬다면 우리 언니들을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 그러니까 나는 열 번이고 백번이고 시간을 돌리더라도 2월에 여행을 시작해 갈라파고스로 향했을 것이다.


서로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보일 수 있을 만큼 막역하면서도 서로가 너무 애틋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당연한 그런 친구 관계를 여전히 꿈꾼다. 언니들은 그런 사람이었다. 가장 가까운 일본이나 홍콩은 안 가봤어도 친구가 가자면 그곳이 스리랑카든 갈라파고스든 따라나설 수 있는 사이. 수화물 누락의 주인공이 되어 팬티 한 장 없을 때도 그냥 옷가게에 들어가 여름옷을 사 입고 깔깔대면 그만인 사이. 홀수니까 누구 하나 소외되지 않게 각자 다른 하트를 만들어 사진을 찍는 사이. 내 앞에서 코를 파도, 모자를 쓴 게 조금 우스워도 전혀 개의치 않는 사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먼 땅 남미에서 함께 나눈 시간을 몇 번이고 얘기하면서 추억에 잠길 수 있는 사이.


스노클링을 다녀와 저녁을 사서 모이기로 했던 시간에 내 티셔츠가 탐났던 지아언니는 상점가를 돌면서 같은 티셔츠를 샀다. 나는 언니들의 우정티셔츠인 푸른 발 부비새 티셔츠가 부러워서 비슷한 티셔츠를 찾아 샀다. 그날 밤 언니들 방에서 넷이 한참 사진을 찍었다. 우리의 기억이 그 사진에 담겨 있어서 쳐다만 봐도 플레이버튼을 누른 듯 그날의 밤이 상영된다. 에어컨이 고장 났었고, 그래서 언니들 방으로 대피했던 밤. 짐이 없는 날 챙겨준다는 핑계로 옷을 내게 넘기고 짐을 줄여보려던 잔머리와, 덕분에 늦은 밤 온갖 짐이 널브러진 방에서 펼쳐진 간이 바자회, 이 세 명의 조합을 보고만 있어도 너무 즐거워서 짐 싸야 되는 언니들 옆에서 최대한 오래 붙어먹으려고 기를 쓰던 그때가.


남미는 지역 이름 조형물이 꼭 있다. 갈라파고스 통틀어 가장 예뻤던 조형물.
용욱과 각자 사진 찍어주던 사이 갑자기 나타나있던 바다사자들.
이렇게 곳곳에 널브러져 잠을 잔다. 너무 많아서 나중엔 신기하지도 않을 만큼 익숙해진다.
첫날 석양
뜨거운 햇빛을 가리고자 샀던 얇은 긴 소매 티셔츠, 빼꼼 보이는 흰색 단화
희한하게도 마당에 텐트 치고 자던 숙소 부부. 우측 하단에 보이는 신발은 언니들의 아쿠아슈즈다.
진짜 황당슨한 사진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하트
진짜 황당슨한 사진 2
웃는 모습을 찍자! 하고 찍은 사진. 이건 가리면 안 되는 사진이다.
지아언니는 결국 나랑 똑같은 티셔츠도 샀었다. 언니들 페루로 떠나고 나 혼자 인스타에 글 쓰고 받은 하트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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