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세는 왜 데미안을 썼을까

상징을 넘어 진심으로; 시대적인 맥락에서 고찰하기

by 수연
"프란츠 크로머 아직도 기억해?"

-『데미안』 122쪽, 헤르만 헤세, 민음사


데미안이 부상당해 누워 있는 싱클레어에게 지그시 묻는다. 전쟁터에서 포탄에 맞고 실려 와 말할 수 없이 나약해진 상태에서도 그 말은 그를 미소 짓게 한다. 그것은 소위 표지를 단 사람끼리 나누는 공범자의 미소와도 같았다. 어린 시절 자신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프란츠 크로머와는 비교할 수 없이 거대한 악의 편에서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주고받고 난 이후였기 때문이다. 당시 독일의 수많은 청년들이 이러한 경험을 했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시대와 역사의 명령에 내몰려 인간을 죽이고 죽임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가벼이 농담조로 던진 데미안의 한마디가 의미심장하게 되울린 까닭이다. 내게는 이 물음이 데미안을 쓴 헤세의 뜻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 반환점이었다. 여기서 뜻밖에 좀 더 깊이 와 닿은 것은 아브락사스와 이분법적인 여러 상징들이 아니라 이야기의 문을 연 첫 문장이다.

내가 열 살이고 작은 도시의 라틴어 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체험 한 가지로 내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 같은 책, 12쪽


실은 싱클레어의 이야기를 읽어나가며 줄곧 라틴어 학교에 다녔다는 첫 구절이 맴돌았다. 알다시피 라틴어는 고대 로마의 문자이고 성경이 기록된 언어다. 그러니 라틴어 학교에서는 유럽 문화의 뿌리가 되는 로마의 역사와 사상, 그리고 무엇보다 성경에 기반한 종교 교육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고대 로마는 지중해를 둘러싼 전역을 넘어 유라시아 대륙 일부까지 정복하고 지배하던 거대한 제국이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속담이 유래할 정도로 드넓고 도로망이 잘 정비된 문명의 중심이었다. 기원전 27년부터 기원후 1453년까지 무려 1500년 남짓 '세계의 지배자'로서 군림하던 로마는 초창기에 특히 유대인과 유일신을 섬기는 그들의 종교를 탄압한다. 하지만 예수의 탄생과 죽음 이후, 황금기를 맞은 제국의 풍요와 사회적 안정을 공고히하려 유대교로부터 파생한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며 이른바 '팍스Pax 로마나Romana', 즉 로마법에 따른 평화를 실현한다. 하지만 팍스 로마나도 로마를 지키는 완벽하게 강고한 알껍질은 못되었다. 당시 로마법은 노상강도를 특히 엄하게 처벌하도록 규정했는데, 사실 로마 제국 전체가 대외적인 강도짓에 시달리는 상황이었다. 로마의 막대한 땅과 재물을 노린 이방 종족들이 사방 곳곳에서 로마의 국경을 넘어 쳐들어왔던 것이다. 로마인들은 자신들과는 달리 정착 생활을 하지도 청결하지도 않은 그들, 날 것을 먹고 떠돌아다니며 싸움을 일삼는 그 이방 종족들을 야만인이라고 불렀다. 결국, 1500년 넘게 이어온 로마 제국의 영광은 이 야만인이라고 불리던 고트족과 훈족 등의 침입과 수탈로 완전히 깨진다.

라틴어 학교와 집에 둘러싸인 싱클레어의 유복하고 이상적이며 안온하기만 한 유년 생활의 평화도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난폭한 짓을 벌이고 호시탐탐 돈이 될 만한 것들을 긁어모으던 야만스런 소년, 프란츠 크로머에 의해 박살이 난다.

이때는 싱클레어가 생각할 수 있는 최대의 악이 프란츠 크로머이던 시절이다. 싱클레어는 두려운 마음에 자신이 크로머가 속한 세계의 아이인 척 과수원에서 품종 좋은 사과를 훔쳤다고 거짓말을 지어내기에 이르지만 도리어 그 거짓말로 인해 크로머에게 덜미를 잡히며 도둑으로 몰린다. 그리하여 협상금을 갖다 바치기 위해 하녀가 시장 보고 식탁에 올려 둔 잔돈부터 급기야 어머니 방의 저금통까지 훔쳐 실제로 도둑질을 범하게 된다.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처음 만난 것은 이 무렵이다. 첫눈에 싱클레어의 괴로운 비밀을 알아차린 데미안은 은밀히 크로머의 손아귀로부터 싱클레어를 구해낸다. 그리고 그에 앞서, 성경에 등장하는 카인이 친형제를 죽인 대가로 신에게 받은 표지에 대해 학교에서 교육받은 것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해석을 내놓아 그를 놀라게 한다. 그 해석의 독특한 점은 성서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보지 않고, 선과 악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뒤집어버렸다는 데 있다. 나아가 이를 성서 밖으로 끄집어내어 선과 악에 대응되는 특정 인물의 이야기에서 일반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이야기로 보편화시켜 놓았다. 즉,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 가운데에는 기존의 질서에 안주하는 대다수의 사람들과 그 틀을 깨고 나오려는 소수의 겁 없는 부류가 존재했는데, 그 중 전자가 아벨에 해당한다면, 후자는 카인으로 상징되었을 것이라고 풀이한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해석을 했을까. 이렇듯 신성모독적이고도 파격적인 이야기로 데미안이 노린 효과는 무엇인가.

데미안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싱클레어가 라틴어 학교에서 신앙심을 굳히는 견진 성사를 받고 난 이후 더 놀랍고 대담한 견해를 내세운다. 바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두 도둑 중에서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야말로 진짜 사나이이며 카인의 후예일 거라고 추켜세운 것이다. 기존의 해석에 반하는 이러한 새로운 생각을 쏟아내며 데미안은 신뿐만 아니라 악마를 위한 예배도 올려야 한다고 한순간 격앙되어 말하는데, 이는 또 왜일까. 이렇게까지 싱클레어를 뒤흔들어 깨우려는 까닭은 무언가. 사실 이 물음은 데미안이 아닌, 데미안의 입으로 나온 여러 말들을 직접 쓴 헤세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다. 대체 헤세는 데미안의 입을 빌려 왜 이렇게 썼을까.

서두에서도 잠시 암시했듯, 헤세가 데미안을 썼을 당시엔 독일이 제 1차 세계 대전에 뛰어든 상황이었다. 소설 후반부에는 추축국이 되는 2차 세계 대전의 양상예지하듯 싱클레어가 몇 년 만에 우연히 그 목소리를 듣고 이끌려 뒤따라간 데미안이 일본인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까지 등장한다. 이 무렵 싱클레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며 선악을 넘어서려는 사유적 모험을 감행한 니체를 편력하는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때 싱클레어와 마찬가지로 갓 대학생이 된 청년들이 갑작스런 시대적 요청에 떠밀려 살육의 현장에 내몰렸다. 철저히 깨어 있어야 살아남는 그 잔혹한 운명의 현장에서, 인간이 개인성을 잃고 생물학적 본능 내지는 시대의 흐름으로 둔갑하는 그곳에서, 그때까지 배우고 익힌 선악의 개념과 고상한 유럽의 교육이 어떤 효력이 있었겠는가. 데미안이 자주 경고하듯 말한 대로 인생이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래서 하필 싱클레어가 견진 성사를 치르던 사춘기 시절 그토록 경악하며 다음과 같이 호소한 것이다.


"(...) 선, 고귀함, 아버지다움, 아름답고 드높은 것, 감상적인 것이지. 옳아! 그러나 세계는 다른 것으로도 이루어져 있어. 그런데 다른 건 죄다 그냥 악마한테로 미뤄지는 거야. (...)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존경하고 성스럽게 간직해야 한다고 생각해. 인위적으로 분리시킨 이 공식적인 절반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를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신을 위한 예배와 더불어 악마를 위한 예배도 가져야 해. (...) 악마도 그 안에 포함하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세상일들이 일어날 때 그 앞에서는 눈을 감지 않아도 되는 신을 위해서 말이야."

- 같은 책, 83쪽

이 모든 것에 눈 감지 않아도 되는 신이 곧 '아브락사스'다.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유럽의 교육과 유럽의 신은 관습과 지고한 것들의 상징으로만 남아있을 뿐, 지금 생동하는 복잡한 삶과 보다 세계사적인 큰 흐름의 변화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라틴어 학교에 다니며 유럽의 교육을 받고 그 신의 보호 아래 있길 좋아했던 싱클레어는 성장하는 내내 그 반대의 힘들에 휩쓸리고 저항하며 이렇게 탄식한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 했다. 그러기가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 같은 책, 128쪽


시대는 인류를 동원해 낡은 알껍질을 마저 깨뜨리고 벗어버리려 몸부림친다. 이때 동원된 인류 가운데 상당수는 싱클레어와 같은 여리디 여린 젊은이들이었다. 헤세는 시대에 희생당해 안주할 곳을 잃고 하루아침에 전장에서 그 옛날 야만인들마냥 떠돌며 서로에게 총구를 휘둘러야 하는 젊은이들의 충격과 고통을 통감했다. 더 나아가 홀로 살아남은 이들이 겪을 무력감과 아픔까지 몸소 살아냈다. 그리하여 이들이 스스로를 짓누르는 공포와 두려움, 극단적인 감정과 절망을 제때 떨쳐버리고 나아갈 수 있도록 데미안이 된 것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항상 예지자로 다가왔다. 불행한 사태가 닥치기 전, 한 발 앞서 싱클레어의 선입견을 깨뜨리는 말을 던져 이 모든 일들에 마음의 준비와 각오를 하게 돕는다.

그리고 지금도 데미안은 유효하다. 전쟁이 종식되고 시대가 더 발전했다고 인생이 더 쉬워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리 앞에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 있고, 깨부숴야 할 내 모습이 있으며, 그 일은 번번이 부상당한 듯한 고통을 준다. 그리하여 한 차례 내면의 격랑을 겪은 뒤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꼬마 싱클레어가 되어 다정하게 속삭여 주는 벗이자 인도자의 음성에 귀 기울인다.


"꼬마 싱클레어, 잘 들어! 나는 떠날 거야. 너는 어쩌면 다시 한번 나를 필요로 할 거야. 크로머에 맞서든 그 밖의 다른 일이든 뭐든. 그럴 때 네가 나를 부르면 이제 나는 그렇게 거칠게 말을 타거나 기차를 타고 달려오지 못해. 그럴 때 넌 너 자신 안으로 귀 기울여야 해. 그러면 알아차릴 거야. 내가 네 안에 있다는 걸. 알아듣겠니? (...)"

- 같은 책, 218쪽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자신 안으로 뚫고 들어가 인도자와 다르지 않은 내면의 소리를 듣고, 제때 스스로에게 예지해줄 수 있을까. 소설 사이사이, 내면으로 깊숙이 침잠해들어가 육신이 주검같아진 모습의 데미안을 싱클레어는 발견한다. 육신을 벗어버린 듯한 이러한 명상은 작은 죽음 같지 않은가. 데미안의 죽음과도 같은 명상은 갱생을 위한 것이었다. 변화하는 삶 속에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 수면 아래 잠긴 빙산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선악과 남녀, 악마와 신, 밝음과 어둠,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 등으로 양분되기 이전의 관점과 활력을 되찾아 솟아오른다.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싱클레어 또한 이어지는 삶의 길을 가다 막다른 골목에 이를 적마다 그리운 인도자를 떠올리며 스스로 갱생의 의식을 치렀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한결 가볍게 벽을 향해 발을 떼어 내딛고 나아가다 그것이 실은 벽이 아니라 새로운 통로로 돌아드는 모퉁이였음을 깨닫고 명랑하게 웃지 않았을까.

이 책의 서문에서 싱클레어의 목소리로 고백하듯 헤세는 작가이기 이전에 사람의 구도자였다. 그의 구도자로서의 열정이 동시대의 '큰 수레바퀴 안'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고뇌와 혼란, 불안한 감수성에 공명하고 감응하여 데미안을 창조해냈다. 이미 만들어진 선과 악의 틀을 깨부수고 나아가라는, 그리하여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라는 간절한 일깨움. 데미안의 형상 안에 서력이 생기기 훨씬 이전 이미 세상에 이름 붙여진 모든 것을 떠나 오로지 자신의 길을 가고 도달한 동방의 오래고 젊은 분의 형상이 겹쳐보이는 건 우연한 일이 아니다. 데미안 이후 그의 다음 여정이 붓다를 모델로 한 싯다르타로 이어진 것은 예지된 만남이자 거듭 새롭게 깨고 나온 모험이었다. 이 모험은 지금 우리에게 계속된다. 그것이 헤세에게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진실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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