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요 Oct 20. 2021

선단 공포증은 주사를 아파하는 게 아니라 무서워하는거야

아픈 게 아니라 무섭다고요.

나는 주사를 보기만 해도 전에 맞았던 부위에 주삿바늘이 꽂혀있는 듯한 느낌이 들고, 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워 눈물을 흘리곤 한다. 벌벌 떠는 수준을 넘어 벌벌벌 떤다. 마치 겨울을 맞이했지만, 난방을 틀지 않아 추워하는 내 맨발처럼 말이다. 그런 나를 보며 사람들이 종종 내뱉는 '명제'를 예를 들어, 내 무서움, 선단 공포증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보기만 해도 아프다.


저 말은 참이다.


-네가 얘냐? 주사 하나도 안 아파.


저 말은 거짓이다.




일단 보기만 해도 아픈 건 내 몸이 산증인이다. 어떤 공감력을 지녔길래 보기만 해도 아픔을 공유받고 고통을 느끼냐고 묻는다면, 나는 자주 눈물을 흘리고 그런 내가 좋다. 거짓말이다. 존재하지는 않는 행위로 실재하는 고통을 겪는 건 정신병이겠지. 뭐. 그렇다고 해서, 날 보고 '정신병자세요?' 하면, 범죄자들의 변명이나 다름없는 병명들을 읊으며 판사 앞에서 심신미약까지 주장해보겠다. 첫 번째 명제를 해결한 것 같으니, 두 번째 명제로 넘어가 보겠다.




주사가 하나도 아프지 않다는 말은 왜 거짓일까? 바늘로 인간을 찌르는데 어떻게 안 아픈가. 당신 바보인가?

'환 공포증'이니, '고소 공포증'이니 하는 것들의 공포는 알아주면서 왜 '선단 공포증'의 공포감은 신체적 아픔으로 귀결시켜버리는지. 애 취급하는 자들에게 나의 고통은 신체적 아픔의 공포가 아니라 정신적 아픔과 더불어 그 고통이 신체적으로 발현된다는 것인데,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백신 주사를 맞은 왼쪽 팔뚝이 아프다. 그 기묘한 감각이 나를 계속 사로잡는다. 지금 글을 쓰는 것도 사실 고통인 게, 주사 맞았던 부위가 아려와서 계속 손바닥으로 눌러주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기 때문에 딴짓을 왕창 하고 왔다. 통증이나 아픔이라고 하기보단 어떤 무시할 수 없는 감각에 가깝긴 하다.




공포와 아픔이 다르다는 걸 설명해야 하는 게 애석하기도 하다. 거기에 '공포증'이나 '정신병'은 가짜라는-어떤 나약함과 관심을 끌기 위한, 혹은 호불호에 대한 것인 양 이야기하는 자를 보면 더욱더 비통해진다. 이해는 간다. '주사! 하나도 아프지 않다!'라는 표현처럼, 사람들은 자주 과장을 하니 말이다. 비아냥거려보면, 조금 깔끔 떠는 걸로 '결벽증'이 있다느니 '정리 강박증'이 있다느니, 전에는 징그러운 정도였는데 이제는 '환 공포증'이라고 말하면서 질색팔색하는 자들 탓이라고 소리 지르진 않을거고. 그냥 비아냥거려봤다. 왜냐면 내가 지금 기분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다, 분노조절장애가 있다고 말해볼까? 뭐, 어쩌겠는가. 나 또한 이야기꾼으로서 자주 과장하고 부풀리고 엄포를 놓곤 한다. 하지만 병적인 것과 병인 것은 다르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한다. 난 시리어슬리 병이 확실하다.




놀라운 사실은 선단 공포증을 앓고 있지만, 문신을 했다는 건데, 타투하는 1시간 내내 우는 동영상이 내 페이스북에 있으나 공개하지 않겠다. 위치는 발목, 크기는 500원짜리 동전만 하며, 귀엽다. 타투를 한 지는 20개월 정도. 여전히 타투 라인을 따라 통증을 느낀다. 주사를 맞으면, 주사를 맞은 그 지점의 감각들이 몇 시간이고 죽지 않고 알려준다. 며칠이 가기도 하고, 몇 주가 이어지기도 한다. 코로나 백신은 좀 오래가는 듯하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해 온 이 증상의 이름을 알게 된 건 중학교 2학년, 오쿠타 히데오의 <공중그네>에서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마피아인 서술자는 나이프만 봐도 벌벌 떨었고, 정신과 의사는 포크와 나이트로 밥을 먹으며 에펠탑은 어떠냐고 물어본다. 에펠탑도 뾰족하지 않냐며.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궁금하다며 그를 점점 공포에 몰아넣는다. 세상에 뾰족한 게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걸 읽고 실험에 돌입했다. 에펠탑, 뾰족한 교회 첨탑, 문구용 칼, 식칼, 빵칼, 샤프심.... 나를 찌를 수 있는 칼과 음식을 써는 칼이 주는 느낌이 달랐으며, 나는 수술용 도구가 끔찍하는 걸 깨달았다. 나의 공포는 경험할 수 있는, 어떤 실현 가능한 범위에서의 찌르기였고, 날카로운 것이 아니라 뾰족함에 좀 더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고등학교 때에는 내가 주사를 맞는다는  모른  맞으면 하나도 무섭지 않다는 걸 알게됐다. 사랑니를 빼기 , 주사 놓겠다고 했을 때에는 온몸이 떨리고 땀을 흘려대서 직원들이 걱정해주며 괜찮다 했던 경험이 있다. 그런데, 교정하면서  생각 없이 있다가 보니까 입안에 주사를 맞은 적이 있는데 무섭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주사를 맞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주사를 맞는다는 사실을 모른 , 주사를 맞을 확률이 너무나도 낮지만 일단 주사기 자체를 눈으로 보지 않으면 공포감이  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백신도  그렇게 맞았다. 주사실에 들어가면 바로 의자에 앉아 어깨를 까고 눈을 감는다. 물론, 무섭다. 무섭지만  무섭다.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던, 살면서 계속해서 공포를 줄이기 위한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나의 '혼자서는 신호등과 버스를 기다릴  없는 강박'처럼 말이다.










웹진 취향껏에서 더욱 다양한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https://www.chwihyangkkeot.com/writing21_k

매거진의 이전글 90년대생의 즐거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