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동물 박제사인가
얼굴이 어딘가 찌그러져 묘한 표정의 리트리버. 기름을 뒤집어 쓴 것 마냥 털이 떡진 비둘기. QR코드를 찍어 작품 설명을 보기까지 당연히 그것들이 제법 잘 만든 동물 모형이라고 생각했다. 미술관을 한층 한층 오를수록 말, 쥐, 비둘기, 개, 당나귀… 이 다종다양한 모형들은 알고 보니 실제 동물을 박제한 것임을 알게 됐다.
‘음, 나 여기 와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며 기분이 아주 묘했다. 죽어 내장이 제거된 뒤 방부 처리된 동물들을 배경으로 사람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순간 이곳 전체가 기이하게 느껴졌다.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WE>는 삽시간에 ‘비인간 동물의 사체는 엄청 많이 박제되어 있는데, 인간 동물의 그것은 없는’ 전시가 되어버렸다.
생각이 꼬리를 문다. 저 리트리버에게는 보호자가 있었나? 보호자는 자신의 반려견이 박제되어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전시품이 될 줄 알았으려나? 수많은 비둘기는? 한국 비둘기인가? 저 많은 비둘기 사체를 대체 어디서 구했지? 비둘기들을 박제해도 좋다는 허가는 받았을까? 그 허가의 주체는 문체부인가 농축부인가? 그런 허가 따위는 없겠지? 아니, 예컨대 오래전 <인체의 신비展>처럼 동물도 신체 기증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개와 비둘기는 말이 통하지 않는데 어떻게? 법적 소유주가 허가해 줘야 하나? 근데 법적 소유주라고 사체 박제권을 주는 건 말이 되나? 동물은 물건이 아닌걸. 이래도 이상하고, 저래도 이상하다. 현대 미술 작품을 보고 깊은 고민에 빠져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심지어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이슈를 가지고.
‘이미 죽은 동물’이라는 면죄부가 주어진 동물 박제 행위. 동물을 다치게 하거나 죽이지 말란 법은 있지만, 죽은 동물을 박제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불법이 아닌 것이다. 작가의 작품 세계가 꽤 크리피하지만 나쁜 사람 같지는 않다. 더욱이 작품을 위해 동물을 죽였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이쯤에서 내 머리에는 ‘존엄’이라는 단어가 두둥실 떠오른다. 대한민국 헌법에 등장하는 원론적이고 멋스러운 단어 ‘존엄’은 작년부터 내 머리에 터를 잡았다. 그러고는 온갖 동물권 문제들을 고민할 때마다 최종 보스처럼 등장한다. 존엄은 가장 기초적인 동시에 매일 파괴되는 가치다. 그래서인지 우리 사회에서 존엄이 엄중하게 지켜질 때 다함께 마음 깊이 감동하고 인류애와 공동체 의식은 배가되는 듯하다. 예컨대 독립투사의 유해가 수십 년 만에 고국으로 송환되었을 때. 폐 동물원에 방치되어 뼈가 앙상해져 버린 일명 갈비뼈 사자 ‘바람이’에게 이전보다 넓고 푸른 보금자리가 생겼을 때.
피-박제 대상은 동물이기에 내게 논쟁의 자격은 없겠다. 하지만 우리 모두 사이에 논쟁의 여지가 희박한 사실은 하나 있다. 내 강아지, 내 고양이, 내 가족 그 누구도 전시장에 박제해 두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
이 ‘박제와 존엄’ 문제를 좀 더 곱고 아름답고 예술적인 형태로 고민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2022년 영화 <애프터 양 After Yang>을 대안으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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